제4장 메소포타미아의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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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고고학자들은 1889년 니푸르 언덕을 깊게 파낸 끝에 놀라운 고문서를 발견했다. 대부업과 부동산업에 종사했던 하 가문이 3대에 걸쳐 작성한 금융거래 기록을 찾은 것이다. 이 가문이 계약, 장부, 증서, 소송 서류를 작성한 시기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마지막으로 번성했던 때이다. 아시리아 연구자 매튜 스톨퍼는 이 풍부한 문서자료를 이용하여 소위 무라수 가문의 이야기를 구성해 냈다. 무라수 가문이 후기 메소포타미아 사회의 금융과 정치에서 한 일을 보노라면, 마치 음모, 추문, 금융거래를 촘촘히 얽어 무소불위의 정부 권력을 조롱하는 요즘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듯하다. 92쪽
제5장 아테네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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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은 은행, 화폐, 상사법정을 발명했다. 로마인은 이러한 혁신을 토대로 금융을 발달시키는 한편 주식회사, 유한책임 투자와 일종의 중앙은행을 덧붙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는 인근에서 생산한 물건을 재분배하는 데 중심을 두고 이를 장거리 교역으로 보조했지만, 아테네와 로마는 인근의 농업 생산력 만으로 뒷발침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하여 주로 해외무역에 의지하게 되었다. 아테네는 필요한 밀 대부분을 멀리는 흑해에서까지 수입했다. 로마는 필요한 곡식을 나일 삼각주의 비옥한 농지에서 얻었다. 이처럼 대담하게 경제를 운영하려면 새로운 금융구조가 필요했다.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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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우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세계에서도 대출과 해상무역 자금조달로부터 금융이 발전했다.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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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은 이곳(피레우스)에서 고대의 항만 터를 찾아냈다. 이 거대한 항구의 북동쪽에 펼쳐졌던 엠포리온은 국제교역의 중심이었다. 엠포리온이란 상인과 투자자와 은행업자가 흑해무역을 하던 장소이며, (후략). 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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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그리스어로 은행을 트라페자(Trapeza)라고 하는데, 이말은 원래 은행업자가 여업하던 탁자를 가리켰다. 여기에서 보듯 은행이 가리키던 대상은 원래 건물 같은 장소가 아니라, 조그마한 가구 위에서 돈을 세거나 계산을 하는 영업이었다. 실제의 부와 추상적 부를 대조한 코언의 가설 그대로, 최초로 등장한 은행이 이름을 따온 대상조차도 장소가 아니라 행동이 일어나던 도구였던 것이다.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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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오래전에 피레우스에서 활동한 은행업자는 기원전 5세기 말에 영업한 트라페지타이(trapezitai) 안티스테네스와 아르케스트라토스이다. 기원전 394년이 되자 이들은 자기 소유였던 해방노예 파시오에게 은행을 넘겼고, 파시오는 기원전 370년 죽기 전에 자기 소유였던 해방노예 포르미오에게 다시 은행을 넘겼다. 이 은행은 대를 이어 오며 기원전 4세기에 아테네의 주요 금융기관이 되었을 것이다. 매 세대마다 은행을 해방노예에게 양도한 사실을 보면, 사업주가 노예게(즉 인적자본을 관장하는 재산권)을 활용하여 전문 기술을 이용했음이 드러난다.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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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업이란 돈을 맡아 주고 대출을 하는 것이다. 은행의 진정한 자산은 가득 쌓인 돈, 거대한 건물, 수많은 직원이 아니고 은행업자의 사업감각, 기회를 알아보는 눈, 영리한 위험관리 방식, 진실하다는 평판이다. 인간의 재능에 단순한 계산 탁자와 세심한 장부기록 방식이 조합된 것이 고대 아테네의 은행이다.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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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보면 아테네의 은행업자는 확실히 예금을 취급했다. 대출을 했다는 증거도 있다. 데모스테네스는 파시온이 50탈란톤짜리 대출채권을 소유한다고 주장했고, 학자들은 아테네 부자들이 일상적으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고 추정한다.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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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차입금은 해양사업이나 사업체 운영 같은 생산적 목적에 쓰이기도 했지만, 각 시점의 소비를 조정하는 데도 쓰였다. 아테네 지배계층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비용이 드는 국가행사를 때마다 개최할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일종의 세금은 재산에 예기치 않은 타격을 안겼으르모, 다른 지배계층 구성원이나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등 금융도구를 이용하여 이처럼 특수한 시점 간 충격을 완화했다 해도 전혀 놀라운 것은 없다.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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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업자는 고객이 재산을 유지하고 자산 충격을 완화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을 뿐 아니라, 투자과정에서도 핵심적인 중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들은 자기 돈을 대규모로 투자했을 뿐 아니라 고객이 직접 투자할 때 돕거나 이를 관리해 주기도 했다.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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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아테네인에게는 다양한 금융 서비스가 필요했다. 즉, 동전을 침대 밑에 보관할 필요가 없도록 예금을 맡아 주는 기본 기관도, 거래 당사자들이 쉽게 거액을 주고받도록 돕는 회사도, 잠시 돈을 빌려주어 경제 충격을 흡수할 원천도 필요했다. 한편 은행업자는 경제적 투자를 촉진하며 경제적 이익을 얻는 동시에 명성과 인맥을 보강하기도 했을 것이다. 117쪽
제7장 로마의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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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계급이 일단 원로원 의원이 되면 이론적으로는 엄청난 규모의 교역에 직접 참여하여 큰 이익을 내지 못하게 되지만 대출 같은 간접투자는 할 수 있었다. 원로원 의원은 부유해야 했지만 한편 자본을 굴리는 데도 심한 제약을 받았다. 이는 명시적 자격요건이었다. 요약하면 원로원 의원은 이익이 많이 남는 사업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재산을 유지해야 했다. 따라서 사업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발뺌하기 위해 금융 행위를 위임하고,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능력이 중요했다. 바로 그러한 기회를 원로원 의원에게 제공하는 제도가 로마 금융체계에서 발달헀다는 사실을 앞으로 살펴볼 것이다.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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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로마에는 부동산담보대출과 채무불이행이 촉발한 금융위기가 몰아닥쳤다. 사치로 악명 높은 후임 황제 칼리굴라와 달리 티베리우스는 공공지출을 보수적으로 운용했기 때문에 국고에는 돈이 충분했다. 서기 33년 금융위기는 민간부문에서 발생했지만, 이를 해결하려면 결국 정부가 신용시장에 개입해야 했다.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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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원로원은 정치적 불확실 등 여러 요인 때문에 발생했을 신용 고갈과 자산가격 하락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자율을 최대 12퍼센트로 제한했지만, 신용위기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위기가 오기 전 가치에 따라 토지로 채무를 상환할 수 있도록 추가로 조치했다. 그리고 부동산담보대출에 따른 연체이자를 탕감했고, 현금 비축을 금지했으며, 대출자가 재산 중 일정 비율 이상을 부동산으로 보유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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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Verboven, Koenraad. 54.44 BCE. “Financial or mpnetary crisis?” Edipuglia,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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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투스에 따르면 원로원 의원은 사실상 모두 대부업자였다. 법 때문에 교역을 하지 못하게 된 원로원 의원에게 대부업은 재산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로마사 연구자 네이선 로젠스타인이 원로원 의원의 재산상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농업만으로 재산을 유지할 만큼 큰 이익을 올린 원로원 의원은 많지 않았다.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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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신용공급이 사라져 돈이 부족해지고 차입자들이 차입금을 상환하려 재산을 매각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황제가 세야누스를 지지하던 사람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매각했기 때문에 자산가격 위기가 더 심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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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파산했다. 재산이 소실되자 계급과 명예가 무너졌다. 결국 황제가 개입하여 은행을 통해 1억 세스테르티우스(sestertius)를 공급하고, 차입자가 차입금 가치의 두 배에 해당하는 토지를 국가에 담보로 제공하면 3년 동안 이자 없이 자유롭게 차입하도록 헀다. 그러자 신용은 회복되었고 민간 대부업자도 점차 눈에 띄게 되었다. (타키투스의 묘사) 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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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에 로마는 이미 여러 번 신용위축과 부동산담보대출 채무불이행 때문에 일어난 금융위기를 겪은 경험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상태였다. 위기가 새로 나타나면 통치자는 앞선 위기에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살펴 지침을 얻었다. 그러면 로마 재무 담당자는 미국이 금융위기를 맞을 때 재무부가 해 온 방식대로 움직였다. 즉, 대출을 통해 신용 부족을 경감하고, 중개기관을 사용하여 해결책을 시행했다. 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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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 계단에서는 로마의 주식회사인 ‘소키에타스 푸블리카노룸'이 계약을 수주하려고 경매에 참여했다. 이러한 회사의 주식도 여기서 거래되었으니, 이 신전은 세계 최초의 주식거래소이기도 한 셈이다.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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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경제 연구 권위자인 윌리엄 해리스(William Harris)는 서기33년 위기를 분석하여 단순하면서도 중요한사실을 짚어냈다. 엄청난 금액이 오갈 때 은화를 주고 받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돈은 금융 중개인, 즉 은행업자로 이루어진 정교한 체계 안에서 오갔다. 황제가 '은행을 통하여' 구제금융을 공급했다는 타키투스의 말을 생각해보자. 정부는 여러 은행을 사용하여, 만기3년에 무이자로 자산 가치의 150퍼센트까지 담보대출을 제공했다. 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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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포룸 동쪽에 있는 비아사크라(고대 로마시의 중심도로 중 하나-옮긴이) 앞에는 바실리카 아에밀리아(Basilica Aemilia)가 서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게가 입주했는데, 그 중 아르겐타리우스(Argentarius), 즉 은행업자의 점포는 출입문의 신이자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제 동전 앞면에 새겨진 야누스의 신전을 마주보는 곳에 있었다. 티베리우스가 구제금융을 공급할 때도 이러한 은행을 중개자로 썼을 것이다. 금고에서 자금이 나오면 이러한 은행은 정부를 주체로 내세우든 자기 이름을 내세우든 간에 담보대출을 실행하고 관리하다 자금을 상환해야 했다. 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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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국고가 있던 곳이 바로 바실리카 아에밀리아 건너편에 건설된 기념비적인 사투르누스 신전 터였다.사투르누스 신전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환금성 자산뿐 아니라 금융장부도 보관하는 장소였다. 로마에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재무 담당자가 정문을 열고 세스테르티우스 은화가 가득 든 큰 자루들을 포룸 너머에 있는 바실리카 아에밀리아에 있는 은행업자의 점포로 옮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바실리카 아에밀리아에 있는 은행업자는 현금을 다루었다. 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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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민간 은행업자는 아르겐타리우스라고 불렸으며 기원전 4세기 중반부터 로마 역사에 나타난다. ‘아르겐타리우스'라는 이름을 보면 이들도 아테네 은행업자와 마찬가지로 환전상에서 기원했을 것이다. (라틴어로 아르겐툼argentum은 은이라는 뜻이다). 아르겐타리우스는 예금을 받고 수표나 장부를 이용하여 송금하고 고객에게 선금을 지급하며, 경매에서, 입찰자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환어음을 통해 송금하는 등 다양한 은행업 서비스를 제공했다.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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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학자 피터 테민의 의견에 따르면 술키피우스 가문은 예금, 계좌이체와 지급, 대출, 투자중개, 경매 낙찰자에게 선금대출 등 현재 은행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물론이고 그 이상도 제공했을 것이다.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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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금융이 마지막에 집중되는 곳이자, 금융제도가 탄생하고 시행되는 곳이었다. 로마의 과점체계는 신용시장을 통해 힘을 키웠고, 정치적 파멸 또는 재정적 파멸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중개 형태를 만들어 냈다.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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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이 지배계층에 속하기 위한 명시적 조건으로 제시된 로마에서는 부를 창출하고 기록하며 보여 주기 위하여 금융체계가 발전했다. 통치와 직접적 경제 이해관계를 애초부터 법으로 분리했기 때문에 정교한 신용시장이 탄생했다. 원로원 의원도 돈을 빌려줄 수는 있었지만 직접 사업에 관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금융중개 분야에는 투자 사실을 숨기거나 독립적 관계로 운영하는 등 방법이 다양했다.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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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세계의 금융을 살펴보면, 우선 금융계약, 담보대출, 지분투자 및 대출방식, 상사법정, 상사법, 사기업, 은행, 은행제도 같은 기본 금융도구는 사실상 모두 기원전에 서남아시아와 지중해 동부에서 출현했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심지어 금융계획, 경제성장 모형, 복리계산, 추세를 기억하고 분석하기 위한 실제가격 기록 등 더욱 정교한 개념 도구도 출현했다. 185쪽
제12장 베네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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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획기적인 것은 베네치아가 8년 후에 자금을 마련한 방법이다. 공채를 발행한 것이다. 정부는 시민에게 보유재산에 따라 강제로 프레스티티(prestiti),즉 채권을 할당했다. 아드리아해 지배권을 놓고 비잔티움제국과 다투다 대규모 인질극과 격렬한 분쟁이 벌어져서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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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대출은 의무였지만 채무관계가 소멸할 때까지 베네치아 정부가 이자 5퍼센트를 지급하기로 약정했기 때문에 세금은 아니라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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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는 1262년에 레가토 페쿠니아이(Legato Pecuniae)라는 포고를 내려 채무를 정형화했다. 이에 따라 앞서 정부가 진 채무는 모두 액면가의 5퍼센트에 해당하는 이자를 매년 두 번에 나누어 지급하는 단일 기금으로 편입되었다. 이 기금이 소위 멘테 베키오(Monte Vecchio)이다. 몬테 베키오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투자자끼리는 채권을 이전할 수 있지만, 정부는 원금을 갚아서 채무를 해소할 수 없다. 채권을 이전할 수 있다면 프레스티티를 강제로 사게 되어도 바로 다른 사람에게 팔면 된다는 얘기다. 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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