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끝나버린 역사, 송나라와 고대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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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역사 즉 인류의 진보는 오랜 옛날에 이미 끝났습니다. 냉전 후의 세계를 축소 복사하여 만든 것 같은 사회가 실은 1000년 전의 중국에서 탄생했었습니다. 후쿠야마는 10년이 아니라 1000년이 늦었던 겁니다. 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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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를 어디선가 한 번 구분한다면, 당(중세)과 송(근세) 사이에서 가를 수 있다'고 하는 테제를 최초로 제창한 것이 전전에 활약한 동양사가 나이토 고난의 '송대 이후 근세설'입니다. 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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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송나라가 어디가 그렇게 획기적이었던 것일까요. 나이토 자신의 발언을 빌리면 '귀족제도를 전폐하고 황제 전제 정치를 시작한 것' 조금 바꿔서 말하면 '경제와 사회를 철저하게 자유화하는 대신에 정치 질서는 일극 지배에 의해 유지하는 틀을 만든 것' 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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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는 자신의 출신지에는 부임하지 못하고 수년마다 다음 부임지로 순회하는 군현제 하에서 경력을 쌓기 때문에 고향에서 다진 기반으로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키거나 하는 염려가 없어졌습니다...국가가 융자를 통해 농민에게 화폐사용이 전파되도록 한 정책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전통적인 물납이 아니라 농작물을 시장에서 판매하여 국가에 변제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청묘법은 일반 서민이 상업에 눈을 뜨고 돈의 의미를 깨닫도록 고안된 것입니다. 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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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이후 중국의 경우 이 칭찬할 때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 남 시대에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주자학입니다. 주자학은 개개인의 인생 교훈이나 관혼상제의 절차에 관한 의례규정의 모음집적인 성격이 강했던 <논어>를 비롯해 기존의 유교 경전에서 오커트 성격의 점보기 취미 같은 것들을 일소해 버렸습니다. 나아가 두 번 다시 당나라 말기와 같이 중화세계를 분열시키지 않을 만큼의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지향하였습니다. 주자학은 체계적인 재독을 통해 '무엇이 인류 전체가 지향해야만 하는 목표인가' '성인은 어떠한 존재이며 왜 이들의 행동이야말로 항상 정당한지'를 분명히 익힐 수 있도록 하나의 정치철학이자 도덕철학으로 기존의 유교를 재편한 것입니다. 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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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미디어가 발전한 중국은 1000년경부터 머리가 좋은 서민들을 수험 경쟁에 열심히 참가시켜서 그 승자를 관료로 선발하는 채용 시스템을 개발했습니다. 그러나 종이가 귀하고 인쇄기술도 없었던 동시대의 일본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섭정, 관백을 배출하는 것은 대대로 후지와라 가문'이라는 식으로 통치기관 내부에서 상류계급의 집안끼리 직위를 나누어 가지고, 집안 내에서 후계자를 육성하는 교육 시스템에 의존해서 관료를 채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후지와라 씨를 정점으로 하는 대귀족에 의한 관위의 가직화, 가산화가 진행되어 장원제와 물납경제에 입각한 귀족정치는 쇠퇴하기는커녕 두고두고 권세를 자랑합니다. 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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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일본과 중국에서 '근세'의 형태가 완전히 반대로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기 때문에 여기서 일단 그 내용을 정리해두고자 합니다...현재의 글로벌 사회의 선구라고도 할 수 있는 근세 송나라 중국=중화문명의 본질을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가능한 한 고정된 집단을 만들지 말고 자본과 사람의 유동성을 최대한으로 높이는 한편, 보편주의적인 이념에 기초한 정치의 도덕화와 행정권력의 일원화를 통하여 시스템의 폭주를 제어하려고 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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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승리하지 못한 '중국화'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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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중국은 세계 패권을 장악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그 틈을 유럽이 메우게 됩니다. 그러나 중국인은 송나라 이후 자유에 맛을 들였기 때문에 한번 주어진 자유를 취소하는 정책은 미국의 금주법과 같이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지역을 넘어선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점점 더 지하경제로 숨어들고 대륙 연안부는 알 카포네 시대의 시카고처럼 밀무역을 장악한 마피아의 온상이 됩니다. 이 연안 마피아의 호칭이 저 유명한 왜구로 특히 후기 왜구가 한중일의 혼성부대가 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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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후반 '은의 대행진'을 설명한 뒤) ...16세기는 실은 전 세계적인 전국난세가 됩니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왜구 마피아 외에 모피와 조선인삼의 교역로를 장악한 만주 마피아, 동남아시아의 은 유통로에 입각한 대만 마피아와 이슬람 마피아, 새로운 참가자인 남만 마피아(유럽)가 움직였으며, 유럽에서는 이 비등하는 화폐욕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와 결부되어 예를 들면 면죄부 판매나 금욕주의에 대한 시비를 둘러싸고 기독교가 분열하여 가톨릭 대 프로테스탄트의 유혈 낭자한 종교전쟁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 대혼란을 어떻게 수습했는지가 각각의 지역 장래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세계속의 어떠한 지역이라도 1600년경에 만들어진 사회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라"라고 모든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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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을 설명한 뒤) 말하자면 그럴듯한 사기꾼이 분식회계가 발각되지 않기 위해 억척을 떤 결과 우연히 진짜 부자가 된 것 같은 이야기지요. 그것을 '진취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 유럽 문명이 정체와 퇴영에 빠진 중국에 비해 우수했으므로 근대화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독히도 염치를 모르는 소리입니다.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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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소수민족에 의한 다수파 통치라는 딜레마를 안고 있던 청나라의 옹정제도 자신을 비판한 한인 유학자를 교화하기 위해 작성한 <대의각미록>에서 오바마와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옹정제는 이 책을 통해 주류인 한민족 사람들이 제시한 이념은 전 세계에 통용되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올바르게 터득한 사람이라면 천자의 자리에 올라도 좋으며, '오랑캐'가 황제가 되는 것은 중화제국의 수치가 아니라 오히려 진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어필했습니다. 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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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쟁의 승자와 패자 사이에 절대적인 격차가 발생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가능한 한 친족 네트워크 구성원을 확대시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이 송나라 이후의 혈족주의였기 때문에 청나라 중국은 엄청난 인구 증가 사태에 맞닥뜨리고 맙니다. 그렇지만 이미 모든 것에 대하여 자유방임주의로 대처하고 있던 정부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적절한 조정수단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최근까지 중국을 고민스럽게 한 과잉인구 시대의 시작이며, 이로 인해 마침내 근대에 들어 국가의 (일시적) 쇠퇴를 겪게 됩니다. 71p
3장 우리들이 좋아하는 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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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일본에서도 중세시대의 반란에는 중국의 민중반란이나 유럽의 농민전쟁과 같은 과격한 무장투재의 예가 많지만 에도시대에는 모두 목소리를 죽이고 맙니다. 일영비교사를 전공한 미즈타니 미츠히로가 마치 춘투와 같다고 평한 미온적인 농민봉기만이 관민의 교섭창구가 되었을 뿐이지요. 요구사항은 다소의 임금인상 뿐으로 정치적 요구는 하지 않습니다. 수상 퇴진과 같은 과격한 요구를 내건 정치파업이 빈발하여 경제가 마비된 전후 유럽이 부러워했던, 이른바 일본적 노사관계의 원점입니다. 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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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에서는 '정치적인 권력자가 경제적으로도 자산가이며 문화적으로도 우월자'인 사회를 '지위의 일관성이 높은 사회'라고 합니다. '어떤 지표에서 우세한 지위를 점하는 사람이 다른 지표에서도 우세한 지위를 점하는 사회'이며,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특정한 승리집단이 모든 것을 독점하고 '패자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사회입니다. 1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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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의 전형적인 형태가 근세의 중국입니다. 과겨 합격자는 관료가 되어 정치적 권력을 휘두르는 한편 종종 합격 전부터 하고 있던 지주나 상인으로서의 부럽도 점점 더 번성하고 뇌물이나 백성에 대한 착취나 '부역'을 포함하여 경제적으로도 부를 이룰 수 있습니다. 또한 당연히 과거에 합격한 시점에서 문화적인 위신도 절대적이며, 머리가 좋을 뿐만 아니라 유교도덕을 체현한 인격적으로도 고매하고 더 높은 존재로서 서민의 기대를 받게 됩니다. 권력도 부도 위신도 모두 독점하는 겁니다. (그 대신에 이것은 세습되지 않기 때문에 혈족 내에서 계속해서 과걱에 합격할 다음 세대를 발굴하지 못하는 한 결국은 일가가 흩어지는 슬픔을 맞이 합니다. 경쟁사회란 이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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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근세일본이란 신분제 사회이면서 실은 '신분이 상위인 자가 모든 것을 독점하고 아래인 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사회'가 아니라 '신분이 상위인 자가 명예를 가지고 아래인 자는 실리를 챙기는 사회'였습니다. 105p
5장 개국은 했지만, '중국화' 하는 메이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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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초기의 일본사회는 남북조 이후 오랜만에 '중국화' 일변도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런 바보 같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메이지유신을 '서양화'로만 보아온 낡은 역사관에서 기인할 뿐입니다. 근 20년 사이의 일본 근대사나 일본 사상사의 전문 연구자의 논의에서는 "지금까지 '서양화'라고 보아온 메이지기의 개혁성과를 잘 조사해보면 실은 이것은 동시에 '중국화'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이라고 할까, 역으로 '서양화' 이상으로 '중국화'의 성격이 강하다"고 하는 견해가 주류입니다. 1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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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학생들에게 "지금의 중국을 알고 싶으면 메이지 일본을 조사하라"고 합니다. 역으로 "메이지 일본을 모르겠으면 지금의 중국을 보라"고도 합니다.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경이적인 경제발전의 활기가 전해지는 반면 도시 저변층의 비참한 실태도 종종 보도됩니다. 그렇지만 그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농촌에 남아있기보다 유민공의 길을 선택한다는 기사를 볼 때 "결국 중국은 풍요롭게 될까, 가난한 채로 있을까, 중국인은 정말로 행복해지고 있는 것일까, 이전보다 불행해진 것일까.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인상을 가진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1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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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썰미 있는 분은 이 시점에서 메이지헌법체제가 정치 시스템에서 '재에도시대화' 되고 있는 점을 눈치 채지 않았나 생각합니다...지도력이 약한 지도자 밑에서 대신부터 의원까지 모두가 계속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현 일본의 정치 구조는 이처럼 메이지헌법에 그 기원이 있습니다...전후에 '정부는 세금을 거두어도 좋으니 그 돈으로 우리 지역에 철도를 부설하고, 공장을 건설하고, 보조금을 지출하라'는 '잘 보살피는 큰 정부'를 지향하는 의원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전국 다이묘적인 토건행정형의 정치권력이 재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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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원래 의회 개설 당시의 중의원 선거는 입후보제도조차 없이 더구나 기명투표였기 때문에 마을마다 분위기를 읽고 모두 지역 보스의 이름을 적는 근세의 요리아이와 동일한 수준의 상황이었습니다, 1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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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야당활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던 상황하에서 '정부의 공식견해보다도 더 애국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형태로 정부비판을 행하는 것이 탄압을 피하기 위한 적절한 전략이었다는 사정도 있습니다. 수년 전 중국의 '반일데모' 역시 그러한 전형입니다. 더 파고 들어가면, 반드시 '독재정권이 민주화 세력을 압살하고 무모한 전쟁으로 돌진한' 것이 아니라 '민주화 세력이 정책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함에 따라 이전 정권 담당자의 결과 중시의 균형적 사고가 민간 여론의 일방적인 동기 중시 강요 노선에 말려들어 승산이 없는 전쟁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측면이 일정 부분 존재합니다. 153p
6장 우리의 에도는 푸르렀다, 재에도화하는 쇼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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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의 무사는 스스로는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조카마치에서 먹고 자기만 하는 쓸모없는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낭비성의 관료와 동일합니다. 그들이 참근교대와 같이 '병 파묻기, 파내기' 수준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공공사업에 엄청난 세금을 투입한 덕분에 고용상인이나 역참 마을에 돈이 돌아서 실제로 도쿠가와 일본은 전국시대의 바닥에서 경기회복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케인스의 세기라고 불린 20세기 전반기는 정확하게 에도시대화의 세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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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노구치 유키오는 이렇게 하여 총력전체제 하에서 1940년 전후에 정착한 국가주도의 재정운영과 기업통치의 존재형태를 '40년 체제'로 이름 붙이고 그 특징은 집단마다 '담장으로 나누어진 사회주의'에 있었다고 합니다. 재향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농촌지역을 통괄하고, 도시지역의 노동자도 회사마다 공장마다의 산업보국회에 묶여 분할되고, 각각의 내부에서 운명공동체 의식을 강화하여 생산에 박차를 가하는 체제! 우리는 이것을 묘사하는 데 더 편리한 용어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에도시대에서 유래한 '봉건제'와 '근면혁명'입니다. 175p
7장 근세의 충돌, 중국에 패한 제국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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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근대에는 존재하지만 중국 근세에는 없었던 것의 전형을 찾아본다먄, 하나는 엄격한 징병제에 기초한 국민전쟁의 경험입니다...이동과 상업의 자유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경쟁사회였기 때문에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여 '국가를 위한 병사가 되어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죽는다'는 것은 중국인에게 너무 맟선 부분입니다. 1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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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소집영장 한 장만으로 숙연하게 징병에 응한 것은 에도시대 이래 강하게 고정된 지역사회의 이웃의 시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근세 이후 그러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알 바 없는 일입니다. 애국심은 촌락사회의 결과였지 원인이 아닙니다. 대리 입대 병사를 '비국민'으로 비난하기는커녕 장사 수완을 칭찬하는 것이 당시 중국 여론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자국 정부인 국민정부의 징병령조차 무시하고 장사거리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일본군의 명령에 따를 의리도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시간이 지나더라도 일본인의 지배에 적합한 질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초조한 마음에 약탈과 학살을 자행합니다. 그러자 점점 더 인심은 점령군에게서 멀어집니다. 193p
8장 너무 오래 지속된 에도시대, 전후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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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표준적인 연구서에 적혀 있듯이 신자유주의는 미영중 3국에서 동시에 시작된 것으로(데이비드 하비), 앵글로 색슨 방식이 세계가 배워야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한다면, 이른바 여기서 중국이 일본을 추월할 것입니다. 지금도 '일본은 선진국, 중국은 후진국'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무지한 일본인 뿐입니다. 2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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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이치사다는 나이토 고난이 말하는 '송나라 중국이 근세'로 들어가기 300년 이전에 이슬함 발흥기의 서아시아가 세계에서 최초로 근세에 들어갔다고 하는 독창적인 역사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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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이 말하는 르네상스란 이슬람이 보존해준 그리스로마 고전의 재수입에 지나지 않지 않습니까. 교황청의 권위를 부정하고 신자의 평등을 설파한 종교개혁은 정말로 이슬람이 카바 신전을 파괴할 때 행한 것이지 않습니까. 주권국가에 그렇게나 집착하던 서양인이 지금은 이슬람주의 같은 유럽주의를 제시하여 '국경을 초월한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까...이렇게 하여 '서양이 항상 동양보다 앞서 있다'는 서구인의 '자위사관'이 사실은 단순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명백해져 중국이나 이슬람과 같은 '정말로 진보된 사회'가 역사의 담당자로 재부상한 것이 1979년이었습니다. 223p
9장 긴 에도시대의 종언, 헤이세이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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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중국화'시켜서 자유경쟁 중심의 사회로 하고 싶은지, '재에도시대화'를 유지하여 다소 정체되더라도 안정된 사회를 만들고 싶은지 정치가 자신이 잘 생각하지 않은 채로 '유신 지사' 기분의 동기우선주의로 행동하며, 유권자 역시 잘 알지 못한 채로 농민봉기 근성의 '아무려면 어때'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수상이나 당명은 바뀌어도 일본사회는 전혀 변하지 않고 정치 불신만이 쌓여가는 것입니다. 2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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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저긍로 고이즈미 정치를 평하는 단어는 '글로벌리즘'이나 '신자유주의'라고 생각하지만, 원래 글로벌화한 세계질서란 송나라 중국의 확대판에 지나지 않으며 신자유주의는 미영중 3국의 동시 발명품인 마늠 어느 쪽이든 같은 것입니다. 그 찬반은 지금도 사람마다 평가가 다르며 최종적으로 역사가 결정하겠죠...당연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같은 것에 '미국주의'라는 이름이면 찬미하지만, '중국화'라고 부르는 순간 거부하는 것은 단순한 인종차별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244p
10장 이제야말로 중국화 하는 일본, 미래의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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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그러한 것(서구화)이 없는 이유 또한 명백합니다. 송나라시대에 근세로 들어간 이래 중국에서 특권 귀족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는 성장을 이룩하여 서구 여러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지만, 정치적인 면에서는 완전히 '서구화'가 진척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실제로 근래의 경제발전에 의해 형성된 중간계층의 의식을 보아도 오히려 공산당의 일당제에 의한 안정된 지배를 희망하는 목소리가 강합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져 부르주아가 대두하면 마침내 시민혁명이 일어나 정치 민주화가 진척된다는 식의 이야기는 '뒤처진 유럽에서는 이전에 그러했습니다'란 종류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2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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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중국화'를 가속시킨 고이즈미 수상은 '참의원의 의결(우정 법안 부결)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중의원을 해산하는' 의회 정치의 원칙으로서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취한 것인데, 국민은 이를 비판하기는커녕 박수를 보냈습니다. 의회를 통해서 행정을 견제하는 유럽식 전통이 약하고, 봉건귀족의 기득권을 몰수하는 것이야말로 오랫동안 행정의 사명이었다는 식으로 황제 전제로 기운 민의가 강했기 때문입니다. 2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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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고이즈미 이후의 정국은 정책 논쟁보다도 스캔들 공격에 의해 좌우되고 있기 때문에 덕치주의의 전통이 강했던 중화세계의 정치양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물론 이를 통해 제대로 기강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 그 자체가 보다 강력한 지배자의 도구가 될 위험성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25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