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가 있는 땅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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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들이 그처럼 멀고도 황량한 바다까지 여행할 수 있었던 까닭은 대구를 보존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 물고기를 추운 공기 속에 매달아놓으면 무게가 5분의 1로 줄어들면서 나무처럼 딱딱한 판자 형태가 된다. 이를 잘게 부숴서 씹으면 마치 건빵처럼 먹을 수 있다. 에이릭이 살던 시대보다 더 앞선 9세기에 이미 스칸디나비아인은 말린 대구를 가공하는 공장을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에 세웠으며, 남는 물건은 북유럽에 가져가 무역하기도 했다.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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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사실상 기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소금에 절이고 잘 말리기만 하면 거의 상하는 법이 없었다. 소금에 절인 대구는 붉은색의 고래 고기보다 더 오래갔고, 중세 북부 국가에서 소금에 절인 식품으로 인기 있었던 기름진 청어보다 더 오래갔다.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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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는 바스크인에게 큰 기회를 제공했다. 중세의 교회에서 부과한 금식일에는 성교는 물론이고 동물의 살을 먹는 것도 금지되었다. 하지만 ‘차가운’ 식품을 먹는 것만큼은 허용되었다. 생선은 물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차가운 식품으로 간주되었고, 물새와 고래도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하지만 육지 고기는 뜨거운 식품으로 간주되었다. 바스크인은 이미 금식일마다 가톨릭교도에게 고래 고기를 팔고 있었다. 금요일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당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날은 모두 금식을 해야 했다. 아울러 사순절 기간인 40일과 종교력에 표시된 다른 여러 기념일도 금식일이었다. 이를 모두 합치면 육지 고기를 금지하는 날은 한 해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이런 금식일은 결국 소금에 절인 대구를 먹는 날이 되고 말았다. 대구는 거의 종교적인 상징이 되다시피 했다. 기독교인의 의무 준수를 위한 전설적인 십자군이 된 셈이다.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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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영국 언론이 기뻐할 만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오래된 편지 하나가 발굴된 것이다. 이 편지는 브리스틀에서 크로프트와 관련된 사건이 벌어진 지 10년 뒤에 크리스토퍼 콜롬버스 앞으로 보내진 것이었다. 당시 콜롬버스는 아메리카의 발견으로 세간의 격찬을 받고 있었다. 브리스틀의 상인들이 보낸 이 편지에는, 그들이 아메리카에 이미 다녀간 적이 있음을 콜롬버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중략) 어민은 비밀을 지켰던 반면, 탐험가들은 그들이 발견한 사실을 세계에 알렸다.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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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497년, 그러니까 콜롬버스가 아시아의 향신료 생산지로 가는 서쪽 항로를 찾아 나섰다가 우연히 카리브 해에 들어선 해로부터 5년이 지나서야, 이번에는 조반니 카보토(영어식 이름 존 캐벗)가 브리스틀에서 항해를 시작했다. (중략)바다에 나선 지 겨우 35일이 지난 1497년 6월에 캐벗은 육지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곳은 아시아가 아니었다. 방대하고도 바위투성이인 해안은 생선을 소금에 절이고 말리기에 이상적이었으며 인근 바다에는 대구가 한가득했다. 캐벗은 대구에 관해 보고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땅의 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새로 발견한 땅’(New Found Land), 즉 오늘날의 뉴펀들랜드가 잉글랜드의 소유임을 주장했다.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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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37년 뒤에 자크 카르티에가 뉴펀들랜드에 도착했고 세인트로렌스 강의 하구를 ‘발견’했다는 공적을 인정 받았다. (중략) 또한 그는 바스크 어선 1000척이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고 기록했다. 53쪽
입을 크게 벌린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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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살에는 지방이 사실상 없고(겨우 0.3퍼센트에 불과하다) 단백질이 무려 18퍼센트 이상이어서 물고기 중에서도 유별나게 높은 편이다. 대구를 말리면 그 살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물이 증발하여 결국 농축 단백질이 된다. 그래서 말린 대구는 단백질이 거의 80퍼센트에 달한다.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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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시장에서 으뜸가는 물고기는 바로 대구다. 이는 과거 여러 세기 동안 사실이었다. 대구야말로 저렴하고도 오래가는 영양 공급원으로서 원체 수요가 많았다. 이는 나날이 가격이 오르는 진미로 평가되는 지금도 여전히 사실이다. 비록 그랜드뱅크스가 폐쇄되기는 했지만 전 세계적으로 매년 600만 톤 이상의 대구목 물고기가 잡히며 그중 절반은 가두스 모루아, 즉 대서양대구다.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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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요리로 만들었을 때의 특징뿐만 아니라 극도로 잡기가 쉽다는 특징도 있다. 이놈들은 얕은 물을 좋아해서 수심 1800피트(약 550미터)까지 내려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대개는 120피트(약 36미터)나 그 이하의 깊이에서 발견된다.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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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보통 20년에서 많게는 30년까지도 살 수 있지만 다산성을 결정하는 요인은 나이가 아니라 크기다. 모든 알이 부화할 경우 인간이 대구의 등을 밟고 대양을 걸엇 건널 수 있으리라는 뒤마의 상상은 그만큼 이 종이 풍부하다는 사실에 관단 19세기적 열광이었다. 70쪽
대구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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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크인의 비밀은 폭로되고 말았다. 런던 주재 밀라노 공사였던 라이몬도 디 손치노는 1497년 12월 18일 밀라노 공작에게 쓴 편지에서 존 캐벗이 그해 8월 6일에 돌아왔음을 알렸다. “그곳의 바다에는 물고기가 득실거려서 그물뿐만 아니라 돌멩이가 담긴 바구니를 바닷속에 넣어서도 퍼 올릴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미스터 존’의 이야기는 워낙 많이 들었습니다. 다른 영국인들도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가져올 수 있을 정도여서, 막대한 양의 장대건조 생선을 가져오던 아이슬란드가 이제는 필요 없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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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설명에 따르면 북아메리카 해안에는 그때까지 유럽 역사에서는 한 번도 기록된 적이 없었던 큰 대구가, 그것도 유례없을 정도의 밀도를 자랑하며 득실거렸던 것이 분명하다.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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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씨 있고 숙련된 항해자였던 캐벗은 1497년 항해를 떠나기 불과 2년 전에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브리스틀로 이주했다. 콜롬버스의 성공을 보며 좌절하는 한편으로 그 스스로 영광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콜롬버스와 캐벗 모두 제노바 출신이었고 태어난 해도 비슷했으며, 두 사람 모두 후원자를 찾아 지중해를 샅샅이 누비고 다녔다. (중략) 북아메리카 항해를 마치고 잉글랜드로 돌아간 캐벗은 콜롬버스가 에스파냐에서 누렸던 것과 유사한 종류의 환영을 받았다. 잉글랜드에서 캐벗은 센세이션의 주인공이었고, 잠깐이지만 이름을 떨쳤다.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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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펀들랜드의 어업은 마치 골드러시에 못지않은 열광과 함께 시작되었다. 1508년 포르투갈의 항구 도시 도루와 미뉴에서 판매되는 생선의 10퍼센트는 뉴펀들랜드산 소금에 절인 대구였다. (중략) 16세기 중반에는 유럽에서 소비되는 생선의 60퍼센트가 대구였으며 이 비율은 이후 2세기 동안 꾸준히 유지되었다. 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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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에는 프랑스인이 이 업계를 지배해서, 뉴펀들랜드로 향한 128회의 어업 원정 중 93회는 프랑스인의 원정이었다. 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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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2년 영국인인 ‘덩치 좋은 존’(John ‘the Broad’)이 그린다비크에 있는 아이슬란드 어업 기지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이 관여한 아이슬란드 대구 전쟁은 20세기에 발생했다고 여겨지지만 최초의 충돌은 바로 이 그린다비크의 살인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때 영국의 상대는 당시 식민지화되어 유순했던 아이슬란드가 아니라 바로 독자적인 해군을 보유하고 있던 한자 동맹이었다.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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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새뮤얼 엘리엇 모리슨에 따르면 1530~1600년 동안은 가라앉은 선박을 대체할 새로운 선박을 주문하는 수요가 역사의 어떤 시기보다도,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 때보다도 높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유럽의 야심은 기술을 앞질렀다. 더 뛰어난 선박과 항해술이 발전되기 전까지 난파와 실종은 이 새로운 모험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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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스틀의 상인들은 포르투갈인과 함께 수많은 합작 사업에 나섰다. 영국 정부는 소금을 받는 대가로 포르투갈 선박을 프랑스 선박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 (중략) 1585년 영국 선박들은 에스파냐의 조업 선단을 공격해서 파괴했으며 에스파냐 해군 함대는 잉글랜드를 침공하려는 위험천만한 시도를 하다가 급기야 파괴되는 재난을 맞이하고 말았다. 85쪽
1620년, 바위와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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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이 시대에 있었던 아메리카의 믿기 힘든 성공담 중에서도 가장 믿기 힘든 것은 바로 ‘나그네들’의 성공담이다. 이들은 애초에 자기네 종교를 믿기 위해, 그리고 신세계에서 어업에 종사하기 위해 닻을 올렸다. (중략) 이들은 농업이 아니라 어업을 위해 뉴잉글랜드로 간 것이었으며, 운 좋게도 뉴잉글랜드에서는 뉴펀들랜드와 달리 겨울에 근해 어업이 가능했다.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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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미스가 낚은 4만 7000마리의 물고기가 6만 마리의 물고기로 터무니없이 과장되어 전해진 때붙 불과 한 세대도 지나지 않은 1640년, 메사추세츠의 베이 식민지에서는 무려 30만 마리의 대구를 전 세계 시장에 내다 팔고 있었다. 99쪽
어떤 불가분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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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이르러 대구는 한때 굶주리는 정착민이 사는 머나먼 식민지였던 뉴잉글랜드를 국제적인 상업 세력으로 격상시켰다. 또한 대구는 메사추세츠에서 단순한 일용품이 아닌 숭배의 대상으로 승격했다. 17세기 대구 어업 덕분에 가문의 부를 쌓아 올린 사람들은 ‘대구 귀족’이라 불렸는데, 이런 가문에 속한 사람들은 이 물고기를 부의 상징으로 여겨 공공연하게 숭배했다.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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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대구 귀족들은 부를 과시하기 위해 저택을 지으면서 곳곳을 대구로 장식했다. (중략) 미국 독립 혁명 이후에는 보스턴의 스테이트 스트리트 앞쪽에 있는 정부 건물인 구 의사당에도 나무로 조각한 대구가 하나 매달리게 되었다.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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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은 가뜩이나 사탕수수를 재배할 땅도 모자란 판에, 카리브해의 작은 섬까지 끌려온 수십만 명의 아프리카인에게 그들이 먹을 식량을 생산하도록 순순히 땅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중략) 덕분에 뉴잉글랜드의 여러 식민지들은 저렴하고도 소금이 들어있는 영양 공급원인 소금에 절인 대구를 카리브 해에 판매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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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로운 무역이 지닌 대단한 이점은 바로 카리브 해가 저가 제품 시장이라는 것이었다. 가공한 대구는 매우 수요가 많은 제품이었다. 때로는 잘못 쪼개진 생선이라든지, 말리는 도중에 날씨가 좋지 않았던 생선이라든지, 소금이 너무 많이 들어가거나 너무 적게 들어간 생선이라든지, 잘못 다루어진 생선 같은 불량품도 나왔다. 이런 갖가지 요인들 때문에 변질된 생선은 가뜩이나 까다로운 지중해 시장에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서인도제도는 이런 불량품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시장을, 그것도 점점 더 커지는 시장을 제공했다. 급기야 ‘서인도제도 급’이라는 표현은 소금에 절인 대구 중에서도 가장 저급한 상품을 가리키는 상업 용어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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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들이 처름 상륙한 지 겨우 25년 만에 뉴잉글랜드인들은 삼각 무역을 하고 있었다. 품질이 가장 좋은 생선은 항상 에스파냐에 가져가서 판매했다. 와인과 과일과 철과 석탄을 생산하던 빌바오는 보스턴의 주된 무역 상대가 되었다. 뉴잉글랜드인들은 끼서 다시 서인도제도로 항해하여 그곳에 에스파냐의 제품 일부와 싸구려 대구를 판매하고, 설탕과 당밀과 담배와 면화와 소금을 구입했다. 그런 다음 지중해와 카리브 해의 제품들을 싣고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들르는 곳마다 돈을 벌어들인 셈이었다. 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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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은 대영제국의 기반 가운데 하나였던 ‘무역 및 항해 조례’(Acts of Trade and Navigation) 때로까지 올라간다. 이에 따르면 식민지인들은 그들이 생산한 제품을 잉글랜드에 판매하고, 잉글랜드로부터 상품을 구매하도록 되어 있었다. 법적으로 따지자면 뉴잉글랜드인들은 에스파냐와 카리브 해와 직접 무역을 해서는 안 되며, 대신 그들이 생산한 대구를 잉글랜드에 판매한 다음에 잉글랜드를 통해 에스파냐산 와인과 철을 구매해야만 했다.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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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구매하고 대금을 지불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바로 현금, 소금에 절인 대구, 보스턴산 럼주였다. (중략) 선주들이 만들어낸 무역의 순환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노예를 싣고 서인도제도로 간다. 그곳의 섬들에서 나온 당밀을 보스턴과 다른 뉴잉글랜드의 항구로 가져간다. 마지막으로 럼주를 싣고 아프리카로 간다. 117쪽
세계 각지의 대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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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혁명은 극도로 비낭만적이었다. 이때의 급진주의자들, 다시 말해 진정한 혁명가들은 사실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메사추세츠의 중산층 상인들이었으며, 이들의 혁명은 곧 돈을 벌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한 혁명이었다.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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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3년에 있었던 보스턴 차 사건은 미국 독립 혁명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곳에서는 존 행콕과 존 로를 비롯한 상인들의 주도로 수입품에 대한 관세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이때 대구 귀족 가문의 상속자들은 마치 모호크 족처럼 차려입고 자기네 배에 올라가 상품을 항구에 내버렸다.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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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이 들리기 시작하고 3년이 흐른 뒤인 1778년에는 양측이 이미 협상할 채비가 되어 파리에서 회담을 시작했다. 1781년이 되었을 때는 오로지 세 가지 이슈만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첫째는 국경, 둘째는 잉글랜드에 대한 채무 지불, 셋째는 어업이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으로 판명된 이슈는 바로 어업이었다.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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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782년 11월 19일,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이 항복을 선언한 때로부터 1년 하고도 1개월이 지나서야 영국인은 그랜드뱅크스에서의 어업군을 뉴잉글랜드에 허락했다. 하지만 아메리카인들은 시장에 대한 접근권까지는 얻어내지 못한 상태였다. 이들은 영국령 서인도제도와의 무역을 금지당했다. 이는 뉴잉글랜드에도 막대한 상업적 손실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단백질 공급원을 더 이상 얻지 못하게 된 카리브 해의 수많은 노예들에게도 비극적인 기아를 초래했다. 1780~1878년 동안 자메이카에서는 무려 1만 5000명의 노예가 굶어 죽었다.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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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잉글랜드인들이 보기에는 1783년 비준된 파리 조약이야말로 어마어마한 승리였다. 하지만 남부인들은 그 조약을 개정하고 싶어 했는데, 영국인들이 그랜드뱅크스에 관한 사안을 양보하는 대신 미시시피 강에 대한 통행권을 얻어갔디 때문이다. 뉴잉글랜드인들은 자기네 어업권에 대한 조약은 이미 서명이 끝난 것이며, 따라서 재협상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대통령은 버지니어 출신인 제임스 메디슨이었다. (중략) 이 이슈는 이후 무려 200년 동안이나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서 긴장의 원천이 되고 말았다.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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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도, 소금에 절인 대구 소비자 대부분은 자기네 지역의 전통적인 가공법에 애착을 느낀다. 현대 몬트리올에는 카리브 해 출신과 지중해 출신의 이민자 모두가 살고 있다. 이 도시의 북부에 있는 장 탈롱 시장에 가보면 상점마다 한쪽에는 심하게 쪼개지고 크기도 작으며 딱딱하게 마른 노바스코샤산 소금에 절인 대구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크고 깔끔하게 가공된 가스페산 소금에 절인 대구가 있다. 카리브 해 출신들은 노바스코샤산을 꾸준히 구입하는 반면,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출신들은 가스페산을 구입한다. 134쪽
새로운 아이디어와 900만 개의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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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업의 현대화를 위한 최초의 시도는 프랑스에서 나왔다. 1815년 새로운 프랑스 정부는 자국 어업의 재건을 위해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중략) 경제 활성화라는 목표는 이 정책의 동기 중 일부에 불과했다. 존 애덤스가 일찍이 지적했던 것처럼, 잘 훈련된 상비 해군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뛰어난 선원을 배출할 수 있는 대구잡이 원양 선단에 보조금을 주는 편이 훨씬 더 싸게 먹혔다. (중략) 프랑스는 신세계로 가는 ㅅㄴ단에 주낙을 설치했다. 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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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굴하지 않는 힘을 지녔다는 것이야말로 19세기에 유행하던 믿음이었다. 이 시기의 특징은 과학에 대한 어마어마한 낙관주의였다. 찰스 다윈으로부터 조금씩 흘러나온 교훈, 그중에서도 특히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지녔던 영국의 과학철학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의 해석에 따르면 자연이야말로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불가피한 해결책을 보유하고 있는 놀라우면서도 확고한 힘이었다. 헉슬리는 당시 영국의 어업 관련 위원회 세 군데에서 위원으로 임명된 바 있었다.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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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캐나다 농업부의 L.Z.종카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중략)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미룽 보건대 이런 물고기들에 대해서는 보호가 불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런 물고기들의 경우에는 고갈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현재 그 포획에 사용되는 수단을 이용해 그 숫자를 눈에 띄게 줄이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155쪽
마지막 두 가지 아이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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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급속 냉동 공정을 개발한) 버즈아이의 냉동 기술 도입은 대구 어업에서 중대한 순간에 해당했다. 미국에서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가공 생선이 아닌 신선한 생선에 대한 수요가 점점 높아졌으며, 미국 내에서 소금에 절인 대국의 시장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었다. (중략) 반면 조업 선단의 역량은 크게 늘어나 1928년에는 최초의 디젤 동력 트롤선이 증기 동력 트롤선보다 훨씬 더 효율적임이 증명되었다. 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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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발전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이 세 가지 혁신(고성능 선박, 저인망, 냉동 생선)이 거대한 공모선이라는 형태로 합쳐진 것이었다. 증기 동력 전개판 트롤선이 지닌 애초의 매력은 돛대와 삭구가 없기 때문에 생겨난 넉넉한 갑판 공간을 생선 가공에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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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에 이르자 과도한 어업을 규제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국제 북서대서양 어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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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이용 쇠사슬은 바다 밑바닥을 휘저어 소음과 티끌을 잔뜩 일으켰다. 대구와 다른 해저 어류는 위험을 감지하면 본능적으로 바닥에 숨는데, 이 몰이용 사슬은 마치 사냥꾼이 덤불을 막대기로 두들겨 새를 몰아내는 것과 똑같은 작용을 해서 겁에 질린 대구가 안전한 바닥 틈새에서 빠져나와 그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이 그물이 휩쓸고 지나가면 해저는 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이 그물이 펼쳐진 넓은 영역에서 헤엄치던 물고기는 모조리 잡혔다.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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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는 이런 기술도 모조리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는 수중 음파탐지기나 정찰용 비행기를 이용해 물고기 떼를 찾아낸다. 이런 기술은 원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적의 잠수함을 찾아내기 위해 개발된 것이었다. 아무튼 이런 기술로 물고기 떼를 찾아내면 트롤선으 그 해역으로 찾아가 싹쓸이를 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목표한 물고기뿐 아니라 그 해역이 있는 것을 모조리 잡아버렸다. 175쪽
아이슬란드에서 유한한 우주가 발견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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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세기 동안 소박한 장비를 사용하는 아이슬란드의 해안 어민 앞에 강력하고 효율적인 해외 선단이 나타나면 해당 지역 정부가 십중팔구 이와 경쟁할 수 있는 자체 선단을 육성하기로 결정을 내리곤 헀다. 아이슬란드에서 처음 구입한 영국제 트롤선은 1905년에 도착했다. 1915년에 이르자 아이슬란드는 모두 20척의 트롤선 선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일부는 신품이고 일부는 중고였지만 대부분은 영국제였다. 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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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정부들은 어민이야말로 유능한 선원들로 이루어진 예비군을 유지하는 저렴한 방법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어민이 이용하는 선박이야말로 손쉽게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선박의 예비대라고 간주했다. ㅌ롤선은 속도가 빠르고 거친 날씨도 견디게끔 설계되었으며 예인도 가능하기 때문에 기뢰 제거선으로는 최적이었다. 나아가 전방과 후방에 포대를 설치하면 트롤선을 순찰선으로도 만들 수 있었다. 1914년 전쟁이 터지자 영국 해군성에서는 영국의 트롤선 가운데 길이 110피트(약 30미터) 이상에 수명이 10년 이하의 배를 거의 대부분 징발해서 사용했다. 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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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어드는 대구 어족에 대한 유예 기간이 또다시 찾아온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였다. 이때도 영국의 원양 트롤선들은 모조리 전쟁을 위해 징발되었다.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자 연합군은 아이슬란드마저 적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섬에 주둔했다. 이제는 영국에 조업 선단이 전혀 없었기에 아이슬란드는 영국 시장은 물론이고 전 세계 시장에 생선을 수출하게 되었다. 189쪽
그랜드뱅크스를 위한 진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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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200마일 영해선이 수립되자 캐나다 정부는 지금이야말로 어업을 뉴펀들랜드의 성장 가능한 경제적 기반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간주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미국과 국경을 확정하고 유럽인을 몰아내야 했다. 그런 다음에야 캐나다는 진정한 배타적 수역을 비로소 보유할 수 있을 것이었다.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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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새로 생겨난 캐나다의 독점적인 근해 어업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 사이, 해안의 어민은 어획량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은 근해의 저인망 어선이 우낙 많은 대구를 잡기 때문에 결국 이 물고기가 산란을 위해 해안으로 이동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것이 이유가 아닐까 하고 의구심을 품었다. (중략) 해안의 어족이 점점 줄어드는 동안 이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점점 더 치열해졌다.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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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수산부 장관 존 크로스비는 세인트존스의 래디슨 호텔에서 설명회를 갖고, 어업이 머지않아 중단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의구심을 잠재우려 애썼다. 1992년 7월에 그는 같은 호텔로 돌아와서 결국 그런 의구심이 옳았다는 사실을 공표했다. 이렇게 북부의 대구 어족에 대한 조업 금지 조치가 내려지면서 3만 명의 어민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미 수년째 트롤선에 대한 조업 금지를 요구해왔던 샘리와 다른 해안 어민은 그날도 호텔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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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월 신임 장관 브라이언 토빈은 조업 금지 기간을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캐나다에서는 노바스코샤 남서부에 있는 한 군데 어장을 제외하고는 대서양대구 조업이 전면 중단되었고, 나머지 해저 어류에 대해서도 엄격한 조업 할당량이 부과되었다. 캐나다산 대구는 비록 생물학적으로는 멸종되지 않았지만 상업적으로는 이미 멸종된 상태였다. (중략) 캐벗의 선원들이 바구니로 대구를 퍼 올렸다는 보고가 있었던 때로부터 500주년을 겨우3년 앞둔 상황에서, 이 모두가 끝나버렸다. 어민이 그 많았던 물고기를 모두 잡아버린 것이다. 2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