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은행과 은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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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탁자 위에서 취급디어쓴ㄴ데, 탁자를 뜻하는 ‘방코’(banco)에서 은행을 뜻하는 용어 ‘방카'(banca)가 파생되었고 그 업무를 수행하는 자는 ‘방키에레'(banchiere)라고 불렸다. (중략) 파산을 가리키는 ‘방카로타’(bancarotta)는 14세기 말부터 때때로 ‘파산 은행'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라틴어 표현 ‘반쿰 에스트 루프툼'(bancum est ruptum)에서 유래한 말이다. 피렌체에서 상인이 파산했을 때 좌판을 부숴 폐업을 알렸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것은 전설에 불과하다. 5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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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레인홀드 뮐러, <베네치아의 화폐 시장, 은행, 공황과 공공부채 1200~1500> 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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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인 은행 활동은 12세기에 토스카나와 제노바에서 태동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은행들은 제노바의 주도 아래 있던 리구리아의 도시들에 주재하던 토스카나인들(그리고 아스티, 피아첸차, 마르세유의 사람들)이 경영했다. (중략) ‘근대 금융의 모든 장치, 즉 당좌대월 지로, 수표'도 등장했다. 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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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전상들은 수수료를 받으며 돈을 버는 대신 현금 유통을 감시하며 국가에 보답해야 했다. 환전상들이 위조화폐나 불량화폐를 발견해서 둘로 쪼개어 거둬들이면 국가는 그것을 원료 상태로 만들어 다시 팔았다. 만약 그들이 규율을 어기면 엄벌에 처해졌다. 은행가에게 부여된 공적인 역할은 국가가 그들의 장부를 ‘거래의 합법적인 증명'으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강조된다. 실제로 환전상들이 회계장부에 기록한 내용은 공증서의 효력을 발휘했다. 이는 신용거래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여정이다.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체계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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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거래에 종사하는 남자들은 관할 행정 당국에 종속되었다. 피렌체의 경우 ‘아르테 델 캄비오’(Arte del cambio)라는 은행가 길드를 통해 통제됐으며,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각각 무역소와 무역재판소를 두어 국가에서 관리했다. 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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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은행의 외형적인 구조는 매우 단순했다. 두꺼운 붉은 색 망토(고귀함과 부유함의 상징)를 걸친 은행가들이 탁자 위에 천을 깔고 돈 자루를 올려두고 있었다. 은행가 옆에는 화폐와 귀금속이 든 금고가 있었다. 일과가 끝나면 모든 화폐가 큰 금고로 옮겨졌다. (중략) 당시 금융의 중심지였던 피렌체에서 “중세의 은행가들은 탁자 하나와 책상 몇 개가 갖춰진 작은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았다. 은행원들은 사무실 구석에서 주판알을 굴리며 계산을 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여섯 명 이상의 직원이 은행에서 일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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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레이몬드 드 루버 <메디치 은행. 기원에서 쇠퇴까지(1397~1494)>. 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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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바에서 미성년자의 후견인들은 피보호자의 돈을 반드시 은행에 예금해야 했다. 은행가들은 이러한 안정적인 저금과 투자 자금을 두 손 들고 환영했다. 그런데 단순히 돈을 저축하는 것으로는 수익 효과가 없었기에 사람들은 적정한 이자율을 보장받으며 돈을 예금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이때부터 입출금 내용을 기재하는 은행 계좌가 활용되었다. 게다가 영민한 은행가는 듬직한 고객들의 현금을 보관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고객의 예치금을 자신의 사업에 투자할 권리"까지 확보했다. 설령 자신의 돈이 아니더라도 돈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빌려줄 수 있었다. 따라서 환전상은 ‘고리대금업자들과 쉽게 구분되지 않았다’. 67p
제6장 담보와 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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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유대인 대부업자들에 대한 조치가 논의되었을 때, 루이 9세의 고문관들은 ‘국민들이 신용거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로부터 250년 뒤 베네치아의 연대기 작가 마린 사누도가 기록했듯이, 유대인 은행가들은 제빵사보다 더 중요한 존재들이었다. 194p
제7장 고리대금업과 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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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프라토 출신의 프란체스코 다티니는 ‘어음의 발명가’라고도 불린다. 프라토 시에 세워진 그의 동상에도 그렇게 명시되어 있다. 다티니는 그야말로 국제적인 수준의 사업을 벌였으며, 환어음을 가장 많이 사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업은 프라토에 본사를 두고 아비뇽,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마요르카섬 피사, 피렌체와 제노바에 지사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거액의 돈을 송금할 때 환어음이라는 수단에 의지했다. 2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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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의 바르디 은행이나 메디치 은행에서 발행된 환어음은 런던이나 파리에 있는 그들의 지점에서 결제되었다. 236p
제8장 복식부기와 주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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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부기의 흔적을 드러내는 오래된 회계장부의 파편과 낱장들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볼로냐에서 1211년 피렌체 은행가들의 장부 일부, 1292년 페루치 은행의 문서, 1297년부터 1303년까지 상파뉴 정기시에서 토스카나 상인 라니에리 피니가 작성한 회계장부가 발견돠었고, 루카에서 1332년 만니 상사와 부를라마키 상사의 미완성 장부, 피사에서 14세기의 회계장부들도 발견되었다. 2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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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페데리고 멜리스, <회계의 역사>, 451쪽
제9장 저축과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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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은행은 스위스인들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와 비슷한 형태의 은행이 이미 14세기 베네치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귀족들은 재산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은행을 이용했다. 먼저 1283년 ‘카메라 델 프루멘토'(Camera del frumento)라는 시스템이 만들어져 밀을 재배하지 못하는 지역에서 전략적으로 밀 판매를 관리했다. (중략) 14세기부터 카메라 델 프루멘토는 예금을 받아주고, 돈을 안전하게 지키며 이자를 쳐주는 은행으로 변모했다. 2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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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스위스 은행이라고 할 수 있는 카메라 델 프루멘토는 군주들만이 아니라 지위를 막론하고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려는 모든 이들을 매료시켰다. 27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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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말에 임의적인 예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교회와 원칙의 수호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이자를 지급하는 교활한 방식이었다. 이자는 증여금이라는 말로 위장되었다. ‘돈을 맡긴 예금주가 받는 이자는 은행가의 재량대로 지급되었기에 증여금이라고 불렸으며, 쌍방이 합의한 일정한 보상이 아니었다'. 이자율은 고정되지 않았고, 예금액에 대한 이자는 해마다 달랐다. 이자가 붙은 원금은 다시 예금주의 자본이 되었다. 예금주들은 연말에 정산된 총예금액을 보면서 뿌듯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았다. 만약 은행이 손실을 보았다면, 그해 말에 풍성한 증여금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여하튼 이자를 받지 않는 한 고리대금업이 아니었기에, 교회는 이에 대해 별다를 제재를 가할 수 없었다. 2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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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팀 팍스, <메디치 가문의 행운. 15세기 피렌체의 재정, 신학과 예술>,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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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의 저축 관행이 어떠했을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평범한 시민이 재산을 지키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침대 밑에 숨겨두는 것이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상업도시에서 은행 계좌는 매우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당시의 명단에 기록된 예금자는 수공업자, 과부, 정치인까지 다양했다.
제11장 의무와 국영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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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치렀던 다른 전쟁들은 이탈리아에 국영은행을 탄생시킨 공채 개혁의 원인이 되었다. 1407년 제노바에 설립된 ‘카자 디 산 조르조'(Casa di San Giorgio)는 1401년 바르셀로나의 ‘타울라 데 캄비스'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국영은행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채증권은 제노바에 있는데, 1214년 1월 22일에 발행한 것이다. 30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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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후반 카자 디 산 조르조는 취급 통화를 기준으로 지점들을 나누어 개설하면서 은행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1586년부터 은행권(중앙은행에서 발행하여 현금으로 쓰는 지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신용장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종이에 예탁금의 액수를 표기한 것으로, 보장하는 예탁금의 성격에 따라 금이나 은으로 지급되었다. 한편 제대로 기능을 갖춘 은행권은 네덜란드의 발명품으로 알려져 있다. 3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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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페르낭 부르델, <물질문명, 경제와 자본주의(15~18세기)>, 4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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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는 예금주들을 공황 상태에 빠뜨린 은행 파산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1569년에 베네치아 정부는 개인은행 신설을 금지했고, 영업중인 은행에는 3년 이내에 청산 절차를 밟으라고 명령했다. 빠르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지만, 공공은행으로 향하는 여정은 이미 뚜렷했다. 그로부터 15년 뒤 1584년, 마지막 개인은행인 피자니-티에폴로 은행이 파산을 선언했을 때, 베네치아 원로원은 국영은행 설립에 관해 논의했다. 베네치아에서 피자니-티에폴로 은행의 파산은 개인은행의 종말을 의미했다. 이후 원로원은 돈을 예금하려는 시민들을 위해 조폐국의 전용 금고를 개방했다. 이는 개인은행에서 국영은행으로 전환이러 이루어졌다는 분명한 표식이다. 3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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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루치아노 페졸로 <베네티아의 국고, 15~17세기 공공 재정과 경제> 1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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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7년에 베네치아의 국영은행 ‘피아자 디 리알토 은행'(Banco della Piazza di Rialto)가 문을 열었다. 이로써 그동안 은행의 부재로 빚어진 도시 내의 혼란과 불편이 종식될 수 있었다. 정부 기관이자 독점기업에 해당하는 국영은행의 총재는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피추천인 가운데 원로원에서 선출하여 3년의 임기로 파견되었다 이러한 인사 방식은 국가가 금융 부문을 점유하거나 지나치게 개입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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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 베네치아의 공공은행은 두 군데로 분리되어, 한 곳에서는 개인의 예금과 관련된 업무를 취급했고, 다른 한 곳에서는 정부의 재정을 관리했다. 그러는 동안 또 다른 공공은행인 지로 은행(Banco Giro)이 문을 열었다. 그곳은 처음에는 곡류를 매입하는 일에 주력하다가 이후 은으로 품목을 바꾸었다. 다른 공공은행의 활동도 서서히 지로 은행으로 집중되어, 나중에는 지로 은행이 베네치아의 유일한 은행으로 자리잡았다. 지로은행은 국영은행의 전설로 기억될 만큼 전 유럽에서 명성을 떨쳤다. 이 베네치아 은행의 유명세는 그레이트브리튼 섬과 미국에도 전해져, 1694년 잉글랜드 은행 설립에 영향을 미쳤다. 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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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찰스 던바 <베네치아의 은행>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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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정부의 새로운 은행은 ㅊ기에 이전 ㅇㄴ행의 기능을 완전히 수용하지 못했던 다소 미흡한 시기를 넘기자, 1797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몰락할 때까지 건실하게 존립하며 명예로운 역사를 남겼다. 180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탈리아왕국의 수도를 밀라노로 정하고 ‘몬테 나폴레오네’(Monte Napoleone)라고 불린 국영은행을 설립했다. 그러면서 베네치아의 지로 은행의 영업도 허용했다. 따라서 지로 은행은 베네치아의 몰락 이후에도 1811년까지 몇 년간 더 운영되었다. 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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