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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그 욕망의 역사

완독일
2022/06/02
카테고리
금융
경제
작가
노블 포스터 혹슨
출판사
수린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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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은행 경영의 역사는 <교역 이야기>의 저자 H.R.F. 본의 말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은행은 새롭기도 하고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상업의 독특한 형태로서, 또 문명의 발달을 촉진하는 개별체로서 은행의 역사는 대략 300년 전까지 더듬어 갈 수 있지만, 그 원형을 추적하면 수천 년까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있다. 즉 인간사회가 시작될 때 은행도 시작되었던 것이다.” 18p

제2장 고대 그리스의 신성한 금고

그리스인들은 사원이 유일하게 안전한 금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소란스러운 시대를 견길 수 있고,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교양계급의 강력한 종교원칙은 물론 파렴치한과 불신자들의 미신과 불안까지 어우러진 사원은 당시 알려진 그 어떤 기계장치보다 훨씬 더 안전할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그리스 사원은 현대 은행 기능의 시작이자 진정 안전한 최초의 금고라 여기는 이들도 있다. 31p

제3장 로마제국의 은행

로마인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급상황에 대비해 세 가지 방식으로 예금을 했다. 첫째, 은행원에게 믿고 맡기는 것, 둘째, 성직자의 보호 아래 두는 것, 셋째, 국가가 주관하는 보호시설에 예치하는 것이 그것이다. 첫 번째 경유는 돈을 직접 보관해야 하는 문제점과 위험으로부터 예금자를 보호한다. 은행원은 예금을 받지만 그에 대한 이자는 지불하지 않는다. 그는 고객의 수표를 감사히 받을 뿐이다. 그러나 돈이 신탁의 형식으로 특정기간 동안 예치될 때, 은행원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그 돈을 사용하거나 투자할 수 있다. 국가는 돈과 귀중품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풍부한 시설을 제공했다. 시민들은 정부가 관리하는 공공 저장소를 안전한 예금 금고로 사용할 수 있었다. 39p

제4장 유대인의 상업적 진화

결국 1146년 교황 유지니는 모든 이자의 무효를 선언했고, 1179년에 교황 알렉산더 3세는 모든 고리대금업자들을 공식 추방했다. 교황의 교서가 유대인의 운명에 가져온 결과는 기이했다. 추방조치는 유대인을 배척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그들을 여전히 상업적으로 가치 있는 존재, 특히 지역 통치자들에게 더욱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유대인 외에는 돈을 빌릴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유대인은 서유럽 통치자들을 위한 고리대금업자가 되었다. 47p
유대인들이 너무나 유용해진 나머지 몇몇 군주는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왕들은 유대인의 개종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고, 1281년까지 영국의 왕은 개종한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48p

제5장 베니스 상선의 은행

1160년 정부는 대여섯 명의 주요 상인들로부터 15만 실버 마르크를 빌리면서 국가 은행의 씨앗을 심었다. 이때 빌린 15만 실버 마르크는 일명 몬테 비끼오(Monte Vecchio), 옛날 빚으로 알려져 있다. (중략) 베니스에서는 은행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 기능이 완벽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서기 1300년 이전에는 시장에 벤치를 놓고 앉은 환전상들의 기록만을 접할 수 있다. 심지어 그들도 이자를 놓고 돈을 빌려주었다. 1318년 이후에야 예금을 받은 은행가를 암시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때부터 많은 귀족들이 은행가가 되었다. 55p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당시 리알토의 상황을 그려낸다. 은행가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선박 투기사업으로 복수의 기회를 잡는다. 유대인들은 직업으로 은행가 밖에 선택할 수 없었고, 그들의 면허는 자주 최소되었다. 56p

제6장 성 조지 은행과 은행의 르네상스

1252년에 대출금은 재무장관과 기타 공직자들로 구성된 법인의 관리 아래 놓여졌다. 각각의 대출금은 이전처럼 다른 보안방식과 이자율로 따로따로 관리되었다. ‘성 조지의 콤페레(Compere of St. George)’라는 명칭은 1252년 공식 채택되었고, 오늘날에도 은행의 설립을 언급할 때 자주 인용된다. 65p
은행이 거대한 공공기관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1407년의 일이다. 공화국은 엄청난 금액을 빌려 보안에 할당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모든 지분은 콤페레, 즉 오늘날 알려진 성 조지 은행에 통합되었다. 67p

제7장 피렌체의 길드와 메디치 은행

현대 금융 용어는 피렌체 은행가들이 사용했던 용어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현금(cash)은 까사(cassa), 은행(bank)은 방코(banco), 분개장(journal)은 지오르날(giornale), 채무자(debtor)는 데비토레(debitore), 채권자(creditor)는 크레디토레(creditore)에서 유래한 것이다. 76p
피렌체의 은행 체계는 완벽할 정도로 조직적이어서 대규모 국제금융으로 발전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미 1260년에 길드는 개인 은행가들에게 신용장을 발부했고, 때때로 야프나 아조프 해에 면한 타나와 같이 아주 먼 곳으로 송금하기도 했다. 77p

제8장

바르셀로나는 몬주익 산기슭에 위치했다. 로마시대에 이곳은 조브 산이라고 알려졌지만 중세시대에는 주다셔서 산으로 불렸고, 유대인 지역으로 완전히 제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르셀로나 최초의 유명한 금융가가 유대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생전에 이름을 떨쳤던 벤베니스테 데 포르타는 1257년에 왕실 후원자가 되었다. 문서에는 그해 12월 17일, 그가 아라곤의 왕 제임스 1세에게 3863수엘도를 빌려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84쪽
1260년 6월에 제임스 왕은 그에게 5천 수엘도에 대한 어음을 발행했다. 이는 최초의 상업어음 가운데 하나였다. 벤베니스테는 바르셀로나 대부분의 비즈니스에 자금을 조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1264년에는 바르셀로나의 주교에게 1만5000수엘도를 대출했다. 이는 양쪽 모두 종교적 편협함에 물들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85쪽
1391년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유대인 거리가 소탕되었고, 수많은 유대인 은행가들이 도시에서 쫓겨났다. 번창하던 도시 비즈니스에 구멍이 생겼고, 이것을 채우는 것은 남은 시민들의 몫이었다. 포목상 길드와 이탈리아의 도시를 본보기 삼은 결과, 전 시민은 바르셀로나 은행을 공적 기관으로 세울 수 있게 되었다. 87쪽
참고: The Bank of Barcelona, probably the oldest public bank in Europe, was established by the city magistrates in 1401. It originated from necessities of the state, as did the Bank of Venice (1402) and the Bank of Genoa (1407).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