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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완독일
2022/10/03
카테고리
국제
일본
작가
요시미 순야
출판사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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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몰락하는 기업국가-은행의 실패, 가전의 실패

1985년 9월 선진 5개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회의에서 체결된 플라자합의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었다. (중략) 이 합의를 거치며 엔달러 환율은 불과 1년 만에 달러당 235엔에서 150엔대로 하락하는 등 엔화 강세로 치달았다. 당연히 이로써 일본의 수출산업은 대타격을 입을 터였기 때문에 정부의 재정투입이나 금융완화 같은 경기부양책이 기대됐다. 급격한 엔화강세를 진정시키는 데는 환율시장 개입도 있을 법하지만, 이는 플라자합의에서 금지수단으로 정해졌다. 따라서 일본은행에는 기준금리 인하로 엔화의 유통량을 늘리는 방안이 요청됐던 것이다. 45쪽
금리가 대폭 하락한 만큼, 시장에서는 보다 많은 자금이 쉽게 유통됐고, 반쯤 필연적으로 인플레이션이 우려됐다. 그러나 과거 금리인하의 영향과 달리 이번에는 넘쳐나는 돈이 주식과 부동산 투자로 몰렸다. 46쪽
일본은행 간부는 1986년 가을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금리인하가 아니라 금리인상이라고 판단했지만, 대장성과 대장상인 미야자와 기이치의 강경한 판단에 저항하지 못했다. (중략) 버블에 대한 대책이라는 의미에서 약 2년 반의 지연은 치명적이었다. 49쪽
간신히 위기를 깨달은 정부와 함께 일본은행은 기준금리를 1989년 5월에 2.5%에서 3.25%로, 10월에 3.75%로, 12월에 4.25%로 인상해간다. 때마침 같은해 4월에는 3%의 소비세가 도입되면서 경제는 방만에서 긴축의 시대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49쪽
1990년 3월 27일 대장성 은행국장 이름으로 발표된, 총량규제 통달 ‘토지관련 융자의 억제에 대해’다. 전자는 버블경기 속에 흠뻑 빠져 있던 증권회사를 요동치게 했으며 야마이치 증권 파탄의 계기가 됐다. 후자는 부동산 매매에 대한 은행 융자를 재검토하도록 해 땅값거품이 장대 쓰러지듯 꺼지는 요인이 됐다. 즉 이들 억제책은 맹렬한 스피드로 달리던 자동차에 급브레이크를 거는 조치였다. 52쪽
파탄은 대체로 ‘주센→증권회사→민간은행→정부계 은행’ 등 금융 카테고리로 볼 때 주변에서 중추로 번져간 것이지만, 각각의 카테고리, 요컨대 ‘호송선단’ 내에서도 열위에 있던 기업이 탈락하고 있다. 훗카이도척시근행은 20대 대형은행의 일각이긴 하되 최하위에 위치했고, 야마이치도 4대 증권사에서 최하위였다. 55쪽
1990년대 말 금융의 실패는 버블시대의 ‘재테크’ 광풍에 휩쓸린 기업의 말로였지만, 2000년대 이후 전기산업의 실패는 보다 뿌리 깊었다. 일본기업의 체질 그 자체가 1990년대부터 진행된 글로벌화와 인터넷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64쪽
정부의 독점적 지배하에서 “전자패밀리 기업의 경영자들은 어느새 민간 기업의 기개를 잃어버렸고, 정부와 NTT의 눈치를 살피는 순종성이 몸에 익었다. NTT로부터 귀여움을 받았지만, 대신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결단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여차하면 정부에 울며 매달리면 된다는 인식이 남아 있었고, NTT로부터 부여된 규정에 가장 적정한 기술을 제공하는 것이 자신의 가치가 됐다. 70쪽
샤프도, 다른 일본 기업도 보다 선명하고 얇은 TV를 만들면 반드시 팔리게 되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상식의 전제가 의심받지 않았던 것이다. 샤프는 타사보다도 성능 좋은 TV를 만들면 팔릴 것으로 믿었고, 또 판로에서도 종래의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관심은 선진국 소비자를 겨냥한 고품질 TV 제조에 편중돼 있었고, 신흥국 시장에 대한 판매 개척에서는 한국의 삼성이나 LG에 크게 뒤처졌다. 75쪽

제2장 포스트 전후정치의 환멸-’개혁’이라는 포퓰리즘

그 몇해 전 도이가 이끄는 사회당은 소비세 인상과 리쿠르트 사건에 휘말린 다케시타 정권을 몰아붙이면서 전국에 도이 붐을 불러 일으켰다. 그로부터 수년 뒤에는 붐의 축이 일본신당으로 이동했고, 사회당은 노조의 후원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전후’가 진정으로 막을 내리던 순간이었다. 107쪽
1993년 호소카와 정권의 탄생은, 일본신당 붐 속에서 부상한 새로운 세대의 정치인과, 정치개혁을 둘러싼 입장차로 자민당을 뛰쳐나온 오자와 등 보수계 세력들의 합류로 빚어낸 산물이었다. 이 합류는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그 최대 성과는 선거제도 개혁법안의 성립이었다. 이 법안이 성립하지 않았다면 그후의 고이즈미 정치도, 민주당 정권의 탄생도 불가능했을 것인 만큼 엄청난 성과였다. 113쪽
(우정민영화 법안은) 중의원에서는 간신히 가결됐으나, 참의원에서는 법안이 부결되면서 폐기됐다. 고이즈미 총리는 민영화의 찬반을 국민에게 묻겠다며 즉각 중의원 해산과 총선거로 맞섰다. 자민당에서는 민영화에 반대한 의원은 공천에서 배제됨에 따라 신당을 결성하거나 무소속으로 출마해야 했다. 이들 의원의 선거구에 자민당 집행부는 ‘자객’으로 불리는 대항후보를 공천했다. 의원들은 줄줄이 낙선했다. 철저한 반대파 분쇄는 ‘우정 민영화’를 총선거의 유일 절대 쟁점으로 삼은 고이즈미식 ‘극장정치’의 교묘한 전술이었다. 127쪽
우치야마 유는 고이즈미 정권의 정치수법에는 두 가지 일관된 특징이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는 “인상적인 한 마디의 활용”과 “선악의 대립구도를 강조하는 정치의 극장화”를 통해 유권자의 감정적 지지를 확보해가는 것이다. ‘적’이 누구인지를 ‘한마디’로 지목하고 자신을 그 강력한 적에 대항하는 도전자로 연출한다. (중략) 고이즈미는 “여당과 정부 내 반대를 물리치고 톱다운식 정책 결정으로 다양한 구조개혁을 실행”했다. 즉 ‘조정’보다 ‘단행’을 선호했고, 이런 점이 ‘강한 총리’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점에 주목했던 것이다. 130쪽
고이즈미 내각은 헤이세이 기간의 모든 내각 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내각이다. 역으로 말하면, 헤이세이의 일본에서 고이즈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성공한 정권은 없다. 130쪽

제3장 쇼크 속에서 변모하는 일본-사회의 연속과 불연속

헤이세이 시대상에 있어서 옴 사건을 판단하는 중요한 열쇠는, ‘우리쪽’의 세계와 ‘저쪽’ 세계를 잇는 매개 안에 있다. 물론 그것은 미디어다. 옴진리교의 아사하라 교조와 교단간부들은 언론 보도가 전혀 허위이며 조작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신자들에 대한 언론의 영향을 차단하려 했다. 이 점에서 옴진리교는 오늘날의 트럼프 정권의 언론 비판보다 훨씬 선구적이었던 것이다. 174쪽
그러나 이 1억 총중류의 상황이 헤이세이가 시작될 무렵, 버블경제 속에서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변화의 방아쇠는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었다. 버블경제 결과, 자산을 이미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격차가 확대됐다. 자기 소유의 집이 없는 사람들은 부동산 가격이 너무 올라 앞으로는 평생 집을 가질 수 없음을 깨달아야 했다. ‘격차사회’라는 단어가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고 답한 사람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으로 자신은 하층에 속한다고 답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184쪽
버블 붕괴와 정보화나 글로벌화의 진행에 의한 경제구조 변동 속에서 대기업의 비교적 높은 지위나 전문적 직종은 여전히 보호된 반면, 그 악영향이 청년층이나 주변적인 노동자에 집중됐다. (중략) 미국처럼 노동자가 보호되지는 않지만 실패해도 재기가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도 아니고, 북유럽처럼 사회보장제도에 의해 노동자의 권리가 보호되는 사회도 아니다. 186쪽
버블붕괴와 글로벌화의 격랑 속에서 일본 사회는 장기불황에 대처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신규졸업자 일괄채용이나 대학에서의 면학의 경시, 정사원과 그외 피고용자에 대한 차별, 젠더차별, 즉 기존의 시스템들을 줄줄이 남겨둔 채 임시방편적 대응을 거듭했다. 189쪽
결국, 헤이세이 일본 사회가 향한 것은 비정규고용의 청년과 여성, 외국인 노동자를 사회 전체가 착취하는 체제의 고착화였다. 이를 정당화한 것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이고, 여기에 동원된 것이 ‘구조개혁’이라는 캐치플레이즈였다. 이런 체제가 침투하면서 등장한 것이 ‘전후’의 총중류화를 뒤엎은 ‘포스트 헤이세이’의 계급사회이다. 195쪽
도쿄권으로의 집중화는 이전부터 있던 지방 과소화 및 도쿄 과밀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사태다. (중략) 앞으로 일어날 일은 불균등한 발전이 아니라, 불균등한 쇠퇴인 것이다. 일본 전체가 생산력을 잃고, 인구도 감소하는 가운데 그래도 도쿄는 지방의 인구를 계속 빨아들일 것이다. 지방에서는 도쿄로 배출할 인구가 동이 나고 있다. 도쿄에 몰린 인구도 온통 늙어가면서 예전 같은 현란함은 전혀 없다. 비유가 아니라, 지방은 절멸하고 도쿄에도 죽음이 임박해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집중은 나라가 소멸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2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