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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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나중에 갚겠다는 왕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은 분노했다. 그리하여 런던탑에 보관했던 재산을 찾아서 금고를 갖고 있던 시내의 민간 금세공업자, 즉 골드스미스에게 맡겼다. 이후 상인들은 상거래를 할 때 자신들의 재산을 보관하고 있는 금세공업자를 이용했다. 물건을 살 때는 금화를 지급하는 대신 금세공업자들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즉시 돈을 받을 수 있는 예금인출증을 건네주었다. 금세공업자들은 보관 중인 예금으 ㄹ바탕으로 대출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은행의 기원이다. 1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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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틀린 사실은 아니지만, 영국의 설명은 지극히 섬나라를 벗어나지 못한 생각이다. 영국이 찰스 1세의 폭정에 시달린 것은 17세기 초이지만, 인류 역사에서 근대 금융업 또는 은행업이 시작된 것은 그것보다 훨씬 빨랐다. 10세기 초 인류 최초의 불태환지페인 교자를 발행할 정도로 상업과 금융이 발달했던 중국 송나라에는 12세기에 이르러 양자강 남쪽 지방에서 전장이라는 조직이 등장했다. 예금과 대출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은행과 똑같았다. 1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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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세도급인들은 장터에서 상인들끼리 주고받은 어음중에서 자기가 다음에 방문할 지역이 지급지로 되어 있는 어음을 찾아 그 어음을 샀다. 그리고 어음지급지에 도착하면 어음발행인에게 그 어음을 제시하고 돈을 받았다. 징세도급인이 다른 지역에서 받은 어음을 현지 장터에서 팔아서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렇게 어음을 이용하게 되면 직접 돈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일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중세에는 송금 업무가 시작되었다. 1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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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경 중국에서도 비슷한 발명이 있었다. 당과 송나라 사람들은 어음을 이용하면, 돈이 날아간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여 어음을 비전 또는 편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어음거래는 명나라 이후 사라졌다. 1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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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징세도급인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 있다. 어음의 매매는 필연적으로 신용 공급을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화폐를 대가로 어음을 산 사람이 어음지급지에서 돈을 받아낼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돈을 받고 어음을 넘긴 사람은 그동안 신용을 제공받은 셈이다. 그러니까 어음할인은 필연적으로 신용 공급, 즉 대금업과 연결된다. 120p
제8장 은행, 인류 앞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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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를 받고 대출하는 합법적인 조직이 없을 때 가장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군주들이었다. 일반 백성이야 근근이 먹고살기 바빠 저축할 돈도 없었고, 아주 형편이 어려우면 교회가 도와주기도 하기 때문에 크게 대출 받을 일도 없었다. 14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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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규제와 규제 회피는 끝없이 이어져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16세기 초에 이르러 마침내 교회 안에서 개선의 목소리가 나왔다. 프랑스의 신학자 장 거송이 ‘차입자를 가혹하게 옥죌 목적으로 대출할 때'만 대금업이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독일의 에크라는 학자가 1515년 <금리 5퍼센트 계약에 관한 연구>라는 책에서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인간이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합리적인 금리 상한선은 5퍼센트라고 맞장구를 쳤다. 푸거 가문에서 뒷돈을 댄 결과였다. 1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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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도 호응이 따랏다. 교황 레오 10세가 같은 해인 1515년 ‘가난한 사람을 위한 대출업법'을 통해 약간의 이자 수취를 합법화한 것이다. 상한선은 5퍼센트였다. 레오 10세는 다름 아닌 제4대 메디치 은행 대표 ‘위대한 로렌초'의 아들이었다. 1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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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7년 베니스에서 지급 결제만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은행이 탄생했다. 그 이전의 민간 금융업자들과 달리 당국이 공식적으로 설립을 허가한 인류 최초의 공공은행(public bank)이었다. (중략) 베니스 당국은 상인들에게 돈을 받아 예금 범위 내에서 은행권을 발행하는 은행을 세웠다. 대출이 금지된 채 오직 예금 받은 범위 내에서 은행권을 발행했던 이 은행은 독점은행이었다. 1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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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정부는) 지출을 통제하지 못하여 새로운 돈줄을 찾아 나섰다. 그래서 1619년 독점체제를 깨고 두 번째 은행을 허가했다. 그 은행의 이름은 ‘결제은행(Banco del Giro)’이었지만, 이름과 달리 정부에 대출도 했다. 정부와 특수관계를 누렸던 이 두 번째 은행은 1637년 원래 있었던 은행을 흡수하고 정부 대출을 점점 느렸다. 그러다가 상당 기간(1717~1739년) 고객의 예금 인출요구를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 사이 찬란했던 베니스의 상권이 기울어갔고, 결제은행도 1806년 문을 닫았다. 1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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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유혹과 역경 속에서도 발권 기관이 원칙을 잘 지킨 사례도 있었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은행이 그 예다. 1609년 기존의 모든 환전상을 몰아낸 뒤 독점은행으로 설립된 암스테르담 은행은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도 금으로 받은 예금을 초과하여 은행권을 발행하지 않음으로써 태환 요구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1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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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 유통으로 먹고살던 네덜란드에는 워낙 많은 종류의 외국 화폐가 유통되었으나 이 은행이 설립된 뒤에는 여기서 발행하는 은행권이 오히려 외국에서 선호하는 화폐가 되었다. 이를 토대로 네덜란드는 물류 유통에 이어 발권제도와 금융업에서도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1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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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이 발달했던 네덜란드에서 발권(예금)은행과 대출은행을 분리해 운영하는 것은 굉장히 획기적인 발상으로, 주변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스웨덴은 1668년 최초의 중앙은행이라고 알려진 릭스방크를 설립하면서 네덜란드의 사례를 본받았다. 이은행은 발권과 대출을 병행했지만, 발권 조직과 대출 조직이 각각 별도의 회계장부를 운용하면서 마치 독립된 은행처럼 일했다. 1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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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 수취가 합법화되면서 16세기 이후 제노아, 피렌체, 베니스, 암스테르담 등지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일반인을 상대로 예금을 받거나 대출을 하거나 송금 업무를 수행하는 조직들이 국가의 승인 아래 설립된 것이다. 대부분은 국가가 나서서 독점을 보장해 주기까지 했다. 1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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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은행들은 지역에 따라 설립 배경과 목적이 전부 다르지만, 대체로 송금(예금)과 발권에서 출발하여 대출로 업무가 확장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이 대출에서 출발했던 가족경영 형태의 사설 은행(예: 메디치 은행)이나 우피치와 다른 점이었다. 157p
제12장 귀항: 그래서 은행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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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사업이 그 이전 유대인들이 담당했던 대금업과 다른 것은 국제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처음에 표면적으로 내세웠던 사업은 무역과 유통업이었다. 방대한 사업망을 통해 무역을 주력 사업으로 유지하면서 부수적인 사업으로서 은밀하고 교묘하게 여수신 업무를 실시했다. 은밀한 것은 재량예금의 수신이고, 교묘한 것은 외화표시 건식어음의 할인이었다. 재량예금의 창구는 오직 통치자, 귀족, 성직자 등 지배계급에만 열려 있었다. 2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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