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금속 상자가 만든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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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4월 26일이었다. 크레인이 뉴저지주 뉴어크항에 정박한 낡은 유조선 아이디얼엑스호에 알루미늄 소재로 된 트럭 바디 58개를 실었다. 5일 뒤 배는 휴스턴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대기하던 58대의 트럭은 금속 상자를 하나씩 나눠 싣고 목적지로 향했다. 혁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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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의 어떤 점이 그토록 중요할까? 컨테이너 자체는 분명 아닐 것이다. 컨테이너는 알루미늄이나 강철을 용접하고 굵은 못인 리벳으로 이어 바닥을 나무로 깔고 한 면에 문 두 개를 단 직육면체 상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런 일반 컨테이너는 주석으로 만든 깡통이 담을 수 있는 모든 설렘을 다 가지고 있다. 컨테이너는 적은 비용을 들이면서 동시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최소화해 상품을 어디에서든, 그리고 어디까지든 운송하는 고도로 자동화된 시스템의 핵심이다. 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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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만 톤 분량의 신발, 옷, 가전제품을 담은 길이 40피트 컨테이너 9000개를 실은 배가 홍콩에서 수에즈운하를 지나 독일까지 3주간 항해하는 데 고작 20명의 선원만 있으면 된다. 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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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듈화의 힘. 숙련노동자가 필요없는 현대차 공장과 비슷. 노동문제 언급할 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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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컨테이너가 세계적으로 사용되기 전에는 운송비용이 수출품 가격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2퍼센트였고, 수입품 가격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0퍼센트였다. 이런 맥락에서 상하원합동경제위원회의 한 고문관은 "이 비용은 정부가 설정하는 무역 장벽보다 더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는데 당시 수입관세는 상품 가격의 7퍼센트였다. 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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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보다 무거운 운송비 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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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운송 과정에서 가장 큰 비용이 드는 부분이 화물을 육상운송에서 출발지 항구까지 옮기는 과정, 도착지 항구에서 다시 트럭이나 기차로 옮기는 과정이었다. 한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6400킬로미터에 걸쳐 운송하는 비용의 절반이 항구에서 선적되기까지의 16킬로미터와 항구에서 하역돼서부터 16킬로미터까지, 도합 32킬로미터 구간에 들어간다." 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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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부분에 컨테이너가 가장 먼저 영향을 미쳤다. 컨테이너가 도입되면서 화물을 작은 포장으로 일일이 나눠 다룰 필요가 없어졌고, 덕분에 부두노동자, 보험사, 부두 사용료 등에 들어가는 비용이 크게 줄었다. 컨테이너는 육상운송에도 빠르게 보급됐다. 그리하여 육상으로만 운송되는 상품도 화물을 싣고, 또 옮겨 싣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이 감소했다. 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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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는 운송비용을 낮추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을 절약했다. 재고품을 더욱 빠르게, 더욱 적은 시간을 들여 처리한다는 것은 공장에서 나온 상품이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기까지 운송 시간이 짧아진다는 뜻이다. 이는 상품이 철로나 부둣가의 창고에서 선적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지출되는 무의미한 재고비용을 줄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51p
제2장 정체된 부두
제3장 트럭운송업자 말콤 맥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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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맥린으로서는 이 운송에 들어간 비용 계산 결과야말로 진정한 승리였다. 1956년에 일반화물을 중간 크기의 화물선으로 운송할 때 드는 비용은 1톤당 5.83달러였다. 그런데 맥린 회사의 전문가들은 아이디얼엑스호에 컨테이너 방식으로 화물을 운송할 때는 1톤당 15.8센트 밖에 들지 않았음을 밝혀냈다. 컨테이너의 미래는 장밋빛으로 환하게 밝았다. 1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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톤당 운송비용이 37분의 1로 줄어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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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맥린은 운송용 컨테이너의 '발명자'가 아니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금속제 화물 상자들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수많은 보고서와 연구서가 아이디얼엑스호 이전에도 컨테이너에 화물을 실어 배로 운송했음을 말해준다. 1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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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맥린의 통찰은 현대사회에서는 상식이지만 1950년대에는 매우 급진적이었다. 이 통찰은 운송 산업의 본질은 배를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 화물을 이동시키는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덕분에 맥린은 예전과 전혀 다른 컨테이너화라는 발상을 할 수 있었다. 상품의 운송비용을 줄이려면 단지 금속으로 만든 상자만 필요한 게 아니라 화물 처리 전반을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전체 체계, 즉 컨테이너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항구, 배, 크레인, 임시저장 창고, 트럭, 기차 그리고 선적인의 화물운송방식 등)가 바뀌어야만 했다. 121p
제4장 컨테이너 운송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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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랜드서비스는 호황 덕을 톡톡하게 보았다. 하지만 거꾸로 시랜드 서비스가 푸에르트리코의 호황에 도움을 준 부분도 있다. 해상운송에 의존하는 푸에르트리코 경제는 높은 운송료에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중략) 그러나 맥린이 1958년에 푸에르트리코 무역에 뛰어들면서 불인슐라라인만 혜택을 보던 운송료 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뒤 10년 사이 뉴욕에서 산후안으로 운송되는 소비재의 가격은 19퍼센트 떨어졌으며, 1톤당 트럭 운송료도 예전의 3분의 2 수준으로 낮아졌다고 한다. 푸에르트리코로 향하는 원재료 및 부품, 푸에르트리코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완제품 운송료가 낮아지면서 공장을 푸에르트리코로 이전하도록 유도하는 요인은 한층 강화되었다. 155p
제5장 뉴욕항에서 벌어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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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자면 1962년 기준으로 컨테이너화는 여전히 주류가 아니었다. 뉴욕항의 전체 일반화물 중 컨테이너가 차지하는 양은 8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국내운송 화물에만 사용되었던 것이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에 남아 있던 국제 화물 중 컨테이너로 운송된 화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조금씩 움직임은 있었다. (중략) 그리하여 1964년 기준으로 뉴욕항 전체의 일반화물에서 뉴저지항의 점유율은 12퍼센트에 다다랐다. 1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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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시작과 대중화의 간극은 생각보다 클 수 있다. 그 길이 맞아도 언제 꽃이 필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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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는 추락하는 길만 남았을 뿐이었다. 브루클린의 부두에서 처리하는 화물의 비율은 1965년부터 1970년까지 18퍼센트 떨어졌다. ILA회장 토머스 글리슨은 "컨테이너가 우리의 무덤을 파고 있는데, 우리는 컨테이너 없이는 살 수도 없다"고 불평했다. 그의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1963년부터 다음 해까지 맨해튼의 고용자들은 140만 인일만큼의 부두노동자의 노동력을 사용했다. 고용은 1967년과 1968년 사이에 100만명 아래로 떨어졌고, 1970년과 1971년 사이에는 35만 명 아래로 줄었다. 심지어 1975년과 1976년 사이에는 수치가 12만 7041명으로 떨어졌다. 20년 만에 91퍼센트나 떨어진 셈이었다. 1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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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뉴저지에서는 모든 예상을 뒤엎는 고용 성장이 이뤄졌다. 해운사와 화물 하역 회사는 일손이 부족하다고 크게 불평했다. 1973년에 뉴어크항과 엘리자베스항에서는 해운사 40개가 자리를 잡았다. 새로 건설된 항구가 급성장하면서, 컨테이너화로 인력 수요가 상대적으로 적게 발생했으나 1963년과 1970년 사이 고용은 30퍼센트나 증가했다. 1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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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발전에 저항할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노동절약형 기술진보도 선도적으로 치고 나가면 고용의 총량이 유지될 수도. 하지만 가능성은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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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의 몰락은 뉴욕시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가난하게 살던 브루클린 주민에게 준 영향은 너무 강력했다. 1960년에 뉴욕시의 전체 인구조사 표준 지역 836개 중 겨우 23개만 브루클린에 있었는데, 이 지역에서 노동자의 최소 10퍼센트가 트럭운송업 및 해양 산업에 종사했다. 지도상으로 보면 브루클린의 표준 지역들은 북쪽의 애틀랜틱애비뉴에서 남쪽은 선셋파크에 이르기까지 해안과 나란히 달리는 띠 모양으로 존재하는데, 지역들끼리 공통점이 많았다. 우선 이민자의 수가 많았으며 주로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소득이 적고 교육 수준이 낮았다. 사우스브루클린의 67번 표준 지역에서는 성인 57퍼센트가 학력이 8학년 미만이었다. 1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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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 기술혁신이 타격이 큰 건 연관성이 높다는 점도 있지만, 재교육이 어려운 계층이 주로 종사하기 때문. 애초에 취약계층인데다 숙련 수준이 낮아서 재배치도 어렵다. 지리적으로도 한 곳에 몰려있어서 지역 자체가 붕괴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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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이 되면 운송 산업 종사 비율이 전체 지역에서 급격하게 줄어든 상태였으며 인구도 감소했다. 이런 변화가 얼마나 심각하게 진행되었던지는 몇 년 뒤의 주택 관련 연구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주민이 10만 명 넘게 살았지만, 부두에 인접해 있던 지역인 선셋파크 및 위터테라스 지역에서 1975년에 개인 소유의 주택 건설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중략) 브루클린은 오랜 세월 동안 뉴욕시의 공장 지대로 압도적인 위치를 자랑했지만, 1980년에는 브루클린이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경제적 조건이 너무도 좋지 않아 브루클린 사람들은 줄줄이 살던 곳을 떠났다. 1971년과 1980년 사이 인구는 14퍼센트 줄어들었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해도 개인소득은 8년 연속 떨어졌다. 194p~1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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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약 기술 발전의 직격탄을 맞은 지역 경제. 한국의 미래가 될 수도 있음.
제6장 노동조합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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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항 전체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자리에서 ILA는 해운사들에게 '자동화에 따른 이익을 함께 나눌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각 작업조에서 한두 명은 뺄 수 있지만, 대신 하루 여섯 시간 노동과 다른 조건을 제시했다. 출발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컨테이너는 부두의 ILA 조합원이 화물을 비우고, 다시 화물을 채운다는 조건, 즉 '비우고 채우기'를 제시했다. 물론 이 '비우고 채우기'는 순전히 사람이 하는 일이었고, 따라서 해운사나 하역 회사 입장에서는 컨테이너화에 따른 비용 절감 효과가 무색해졌다. 며칠 뒤 뉴욕해운협회는 자동화에 대한 무제한의 자유를 보장하면 부두노동자의 정규직 일자리를 보호하겠다는 보편적인 수준의 수정 제안을 내놓았다. 2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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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발전을 위한 노동자와의 협상. 결국 기술 진보를 통해 이룬 수익성 증가분을 나누는 형태가 될 것. 이걸 얼마나 잘해내느냐가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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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협회는, 모든 부두에서 컨테이너를 비우고 채우겠다는 노동조합의 제안을 거부했지만 자동화 때문에 손해 보는 노동자에게 보상을 해줄 목적으로 떼는, 이른바 '컨테이너 세금'은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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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차례의 팽팽한 협상이 이어졌고 마침내 1960년 10월 18일에 기념비적인 '기계근대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중략) 총체적인 유연성을 보장받는 대가로 고용주 측은 연간 500만 달러를 지급하는 데 동의했다. 일부 금액은 퇴직자 지원 자금으로 들어가기로 했는데, 25년 경력의 부두노동자가 65세에 은퇴하면 약 70주의 기본급에 해당하는 7920달러를 즉시 받고, 따로 ILWU 연금으로 1개월에 100달러씩 받게 되었다. 62세에서 65세의 노동자가 조기 퇴직을 하면 65세까지 1개월에 22달러를 지급받게 되었다. 2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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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근대화협정은 사방에 놀라움을 안겼다. 충분히 예상했던 첫 번째 결과는 퇴직자 물결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것이었고, 예상대로였다. 고령 부두노동자들의 은퇴를 장려하는 보상 제도의 영향으로 65세 이상 노동자 수가 1960년에는 831명이었지만 1964년에는 321명으로 줄었으며, 60세에서 65세 사이의 노동자 수도 20퍼센트 감소했다. 그런데 양측의 기대와 다르게 현업 노동자에게 지급하기로 한 소득 보장은 불필요했다. 일거리가 줄어 부두노동자가 남아돌 것이라는 예상과 갈리 화물 흐름이 늘어남에 따라 오히려 인력이 부족해졌다. 2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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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진보와 수익 배분 협상의 결과. 하지만 빠른 진보가 이뤄지면 고용이 유지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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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협정은 해운사들이 생산성 향상이라는 기준에서 기대했던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만들었다. 1960년 이전까지 20년 동안 노동생산성은 정체 상태였다. 고용주가 비컨테이너화 화물을 처리하는 작업 방식을 바꿀 수 있게 되면서 한 사람이 한 시간에 처리하는 화물의 무게는 5년 만에 41퍼센트 일어났으며, 전반적 생산성도 8년 만에 두 배로 올랐다. (중략) 그런데 조합의 예측과 다르게 거대한 생산성은 자동화가 아닌 노동자의 땀의 결과였다. 경제학자 폴 하트만은 그 기간 동안의 추세를 면밀히 분석한 뒤 이렇게 썼다. "여러 정황을 보면, 고용주들은 대부분 혁신하거나 새로운 투자를 하기보다 작업 현장의 노동자들을 쥐어짜 물리적인 노동의 양을 늘리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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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협상이 가져올 수 있는 더 큰 보상. 하지만 기술 진보는 사용자의 협상력을 높여줘 그 자체로 노동자 착취의 도구가 될 수 있음. 자동화를 하지 않고도 도입한 것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제7장 세계화를 연 표준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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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궤간 표준화와 컨테이너 표준화에는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하나는 파급력의 범위였다. 궤간은 오로지 철도에만 영향을 미쳤지만, 컨테이너 설계는 해운사뿐만 아니라 철도 회사와 트럭 회사 심지어 독자적으로 자기 설비를 가지고 있는 선적인, 즉 상품 제작업체에게도 영향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시기였다. 철로가 부설되고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야 궤간의 차이가 매우 심각한 문제로 제기된 데 비해 컨테이너 운송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이 산업이 성장하기 전에 표준 설정을 밀어붙이는 일은 위험했다. 나중에 심각한 문제가 밝혀질 수 있는 표준으로 모든 관련 업체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옭아맬 수도 있었다. 247p
제8장 컨테이너 시대가 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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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초를 기준으로 컨테이너가 도입된 지 9년이 지났다. 그런데 이 9년 동안 컨테이너가 거둔 성과는 긍정적인 면이 있어도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다. 뉴욕항의 컨테이너 화물 처리량은 정체된 상태였으며, ILA는 여전히 컨테이너의 성장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2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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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해운 산업에서 수익을 낼지 확신할 수 없는 일에 무려 25억 달러나 되는 돈을 투자한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과감한 모험이었다. 여러 해 동안 한 발 떨어진 위치에서 호기심을 가지고, 그러나 애매한 태도를 취한 채 컨테이너화를 지켜보던 다른 해운사들은 서둘러 나서지 않으면 거대한 홍수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절실하지는 않았다. 3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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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빠르게 오기도 하지만 혁신이 생각보다 늦기도 하는 이유. 엄청난 돈을 퍼부어야 하며 그게 언제 결실을 맺을지도 모른다. 못 맺는 경우도 있다.
제9장 베트남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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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슨은 1970년에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컨테이너를 그저 또 하나의 운송수단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컨테이너의 이점을 온전하게 누리려면 컨테이너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군수 체계가 먼저 마련되어야 합니다." 베슨의 발상에서 보자면 민간 부문의 선적인들도 이제 막 첫걸음을 뗐을 뿐이었다. 334p
제10장 폭풍 속의 항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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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에 새롭게 건조된 컨테이너선들은 예전의 컨테이너선보다 훨씬 더 많은 화물을 실어 날랐다. 이것은 화물 총량이 아무리 늘어나더라도 운항 횟수는 오히려 줄어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선주들은 배의 운항 횟수가 많아야 배를 건조할 때 투자한 비용을 회수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배가 한 번 항해에 나설 때 편도 기준으로 네다섯 군데가 아니라 한두 군데 항구만 기항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이류급의 항구들은 대양을 항해하는 컨테이너선을 만나보기 어려웠고, 일류급의 큰 항구에서 짐을 실어오는 피더선을 맞이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떤 항구가 한 번 일류급에서 탈락하면 다시 그 지위를 회복하기는 어려웠다. 3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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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에 컨테이너선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도 네덜란드의 부두노동자들은 영국의 부두노동자들과 달리 반대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노동조합 때문에 2년 반이나 지체되는 동안, 로테르담항은 6000만 달러를 들여 정박지 10곳을 갖추고 추가로 정박지를 더 만들 공간인 유럽컨테이너종점을 세워다. 예전에는 런던항 및 그 밖의 다른 영국 항구로 갔던 화물들이 로테르담항으로 이동하면서, 로테르담항은 세계 최대의 컨테이너 중심지로 발전했다. 3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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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유럽에서 컨테이너 운송에 대한 준비가 진행되었던 과정은 아시아 여러 국가들에게는 훌륭한 교재였다. 미국에서 항구들은 컨테이너화에 아무런 논리도 없이 대응했다. 즉 필라델피아처럼 중요한 컨테이너 항구가 될 수도 있었던 도시들이 제때 투자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도시들은 귀중한 자금인 세금을 초기 투자비용을 회수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부두나 크레인에 투자했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정부가 부두노동자의 노동조합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컨테이너 시대를 맞을 준비를 거의 하지 못했다가 컨테이너선이 항구에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행동에 나섰다. 3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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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무버가 별로 좋지 않은 이유. 시행착오를 줄여서 성과를 거두기에는 패스트 팔로우로 충분하다.
제11장 호황에서 불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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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월 10일, 뜻밖의 소식이 해운업계를 흔들었다. 컨테이너 운송의 아버지 말콤 맥린이 시랜드서비스 매각에 나섰다는 소식이었다. 이번에도 그의 시기 포착은 다시 한 번 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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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랜드서비스가 베트남, 서유럽 그리고 일본으로 사업을 확장한 덕분이었다. 컨테이너 운송은 바야흐로 떠들썩한 성공 사업 그리고 매우 많은 자금을 들여야 하는 사업으로 바뀌어 있었다. 1968년 말에 시랜드서비스의 부채는 1억100만 달러나 되었으먀, 그중 2200만 달러는 그해 안에 갚아야 했다. 1969년에는 배 여섯 척을 개조할 계획이었는데, 여기에 들어갈 자금만 추가로 3900만 달러가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컨테이너와 관련 장비를 구입하는 데도 3200만 달러가 추가로 들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해운업계의 군비 경쟁이 가열되면서 재무 압박은 더욱 심해질 전망이었다. 3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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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저주. 1등 마저도 끝없는 출혈에 빠지게 만든다. 혁신은 소비자에게는 좋지만 투자자에겐 저주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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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제품 생산업체들은 파손되거나 도둑맞기 쉬운 전자제품을 컨테이너에 담아 운송할 때 가장 안전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깨달았다. 1960년대 초부터 일본의 전자제품 수출은 꾸준하게 성장했는데, 컨테이너로 운송할 때의 운송료와 재고비용이 상대적으로 낮고 보험료 부담도 적었다. 즉 컨테이너가 일본의 전자제춤이 미국에서,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에서 일상용품으로 자리를 잡는 데 중요하게 기여한 것이다. 39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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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조선소는 밀려드는 주문으로 정신없이 바빴다. 1971년과 1972년에 새로운 배들이 취항하자 여러 해 동안 기다렸던 동아시아의 항구들도 분주해졌다. 환태평양 아시아의 여러 국가는 일본과 비슷한 수순을 밟았고 무역량은 큰 폭으로 증가했다. 한국의 해상 수출은 1969년에 290만 톤에서 1973년에 600만 톤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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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의 이순신 담판은 1970년. 컨테이너의 확장을 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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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상선의 대부분은 전쟁 때 군대가 사용하던 배를 정부가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으로 해운사에 넘겼다. 선주들은 융자금을 갚아야 하는 부담에 시달리지 않았다. 이들이 지출했던 비용은 화물 처리 비용, 부두 사용료, 선원 인건비, 연료비 등 주로 운영비용이었다. 불경기라면 선주는 폐선시키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비용이 발생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컨테이너 운송의 경제학은 완전히 달랐다. 우선 배와 컨테이너 그리고 섀시를 사는 데 막대한 금액을 대출받았으므로, 원리금 상환의 압박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는 컨테이너 터미널도 그렇다. 해운사로서는 빚을 내서 짓거나, 사용료를 내고 빌려서 써야 했다. 이런 식으로 들어가는 고정비용이 컨테이너 운송 서비스를 유지하는 총비용의 4분의 3이나 되었다. 3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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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벌크와 다르게 컨테이너 운송에서는, 선주들이 일시적으로 자기 배를 놀려도 수요에 비해 선박이 지나치게 많은 공급과잉은 줄지 않는다. 더군다나 해운사들이 화물을 닥치는 대로 선점하려고 들기 때문에 운송료가 떨어지며, 해상운송에 대한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기 전까지는 공급과잉이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397p
제12장 규모를 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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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의 중요성은 커졌지만 항구의 위치는 점점 의미가 없어졌다. 전통적으로 항구는 무역 흐름을 잠깐 멈추게 함으로써 번성했다. 통관중개업, 도매업, 배송은 항구도시에 집중되어 있었고, 뉴욕시가 대표적이었다.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화물이 도시에서 일단 멈춰 있어야 했다. 또한 항구는 그 항구의 배후 도시와 금융상업적으로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지리학자들도 배후 도시를 항구의 지류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런데 컨테이너 운송에서는 배후지가 없었다. 컨테이너는 항구를 단순한 화물집하장으로 만들었다. 4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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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의 중요성은 커지고 위치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동아시아의 기회가 된 환경
제14장 저스트 인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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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만 하더라도 수직적 통합은 제조업에서 거스를 수 없는 표준이었다. 회사는 원재료를 자사가 운영하는 광산이나 유전에서 구했고, 자사의 트럭, 배, 기차로 원재료를 공장으로 보냈다. 일련의 공정을 거쳐 완제품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1970년대 말에 화물운송비가 뚝 떨어지고 하나의 운송 매체에서 다른 운송 매체로 옮기는 과정이 빠르고, 기계적인 반복으로 바뀌자, 공장은 모든 것을 직접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4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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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전에 'logistics'라는 용어는 군사 용어였다. 그러나 1985년이 되면 생산, 재고, 운송, 배송의 전체 일정을 관리하는 '로지스틱스 매니지먼트'는 경영의 일상 용어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제조업체들만의 전유물도 아니게 되었다. 소매유통업체들도 공급망을 관리할 수 있음을 깨닫고, 제조업체와 소비자 사이에서 중간 마진을 챙기는 도매업체를 배제했다. 4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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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화의 경제학은 이런 세계적 공급망들을 여러 가지 특이한 방식으로 형성해왔다. 이제 운송 거리는 큰 문제가 아니다. 운송 거리가 두 배여도, 예를 들어 도쿄에서 로스엔젤레스가 아니라 홍콩에서 로스엔젤레스까지 운송되는 화물이어도 추가 운송비는 18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최종시장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여도, 원활하게 운영되는 항구가 있고 유통되는 물량이 많다면 얼마든지 국제적인 공급망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 4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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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화는 국제운송비용을 어느 쪽에는 상대적으로 많이 줄여주었지만 어느 쪽에는 덜 줄여주었다. 사방이 육지인 나라들, 기반 시설이 부실한 나라의 내륙, 컨테이너 운송 수요를 창출할 정도로 많은 경제활동이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들 등은 과거 브레이크벌크선 시대보다 지금 더 경쟁력이 취약하다. 어느 논문의 계산에 따르면 사방이 육지일 때 화물을 배에 싣는 선적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평균적으로 1.5배나 된다. 또 다른 논문은 미국의 대서양 연안에 이는 볼티모어항에서 컨테이너 하나를 선적해 남아프리카의 더반까지 수송하는 데 2500달러가 드는데, 이 화물을 더반에서 346킬로미터 떨어진 레소토의 수도 마세루까지 육상으로 운송하면 추가로 7500달러가 든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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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화가 부른 승자와 패자. 해양 국가가 훌쩍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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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 운송의 혁명적인 나날들은 1980년대 초에 끝나고 있었다. 그러나 컨테이너 혁명의 후폭풍은 계속 이어졌다. 지난 30년 동안 컨테이너 운송이 국제 화물의 운송비용을 떨어뜨리기 시작하면서 컨테이너에 실려 해상으로 운송되는 화물의 양은 다섯 배로 늘어났다. 독일의 최대 항구인 함부르크항은 1960년에 일반화물 1100만 톤을 처리했다. 하지만 1996년에는 4000만 톤이 넘는 일반화물이 함부르크 부두를 경유했으며, 88퍼센트가 컨테이너 화물이었다. 또 전체 화물의 절반 이상이 아시아에서 온 것이었다. 2014년에는 함부르크항이 처리하는 일반화물 무역량은 1억 톤이나 되었다. 4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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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들의 경이적인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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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의 화물 흐름을 처리하는 효율적인 항구에는 지구 구석구석으로 곧바로 향하는, 보다 많은 컨테이너선이 보다 자주 들르게 된다. 1990년부터 2010년 사이 중국, 말레이시아, 태국에서 건설된 대규모 항구들은 세계화에 대한 투자 자산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항구였으며 컨테이너 물동량이 적었던 피레우스는 중국 국영 해운사인 중국원양운수집단이 2009년에 인수해 현대화에 10억 달러를 투자한 뒤 불과 5년 만에 경제 규모가 10배로 성장했다. 47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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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게걸스럽게 집어 삼켰다고만 알려졌던 피레우스항의 근황. 중국의 역할이 꼭 약탈적이기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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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항은 200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중국 국제무역의 대부분의 화물을 처리했는데, 중국 본토에는 대형 컨테이너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4년이 되면 전 세계의 10대 컨테이너항 중 일곱 곳이 중국에 있었고, 유럽이나 서반구에서는 이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다. 4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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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경이적인 성장.
제15장 부가가치 창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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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업계에 속한 많은 사람의 생각과 달리 서두른다고 해서 컨테이너 시대에서 살아남는 건 아니었다. 예전 미국 국내 거래에서만 활발하게 활동했던 해운사 맷슨네비게이션은, 고객을 확보하면 고객이 끝까지 의리를 지킬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가졌다. 컨테이너를 싣고 태평양을 건너는 노선을 가장 먼저 열려는 경쟁을 치열하게 벌였고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나중에 후발주자들이 이 노선에 뛰어들었을 때 고객들은 의리 따위는 애초부터 마음에 두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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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생명은 속도가 아닌 방향. 서두른다고 반드시 성공하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