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일촉즉발의 시장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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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업과 다른 제조업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다른 기업들은 제품 원가와 품질에 사업 성공 여부가 좌우되는 반면, 금융기관의 성공 여부는 시장의 신뢰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신용'(Credit)은 라틴어 '믿음'(Credo)에서 유래한 단어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앍 있는 것에 예금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 즉 일부 금융기관을 신탁(Trust)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금융의 취약성을 감추면서 은행의 안전성과 영속성을 보여주기 위해 전통적인 은행 건축물이 화강암으로 외벽과 기둥을 세우는데 치중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모든 금융기관은 신뢰를 바탕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신뢰는 쉽게 사라진다. 신뢰는 이성적이거나 비이성적인 이유로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다. 신뢰는 별것 아닌 이유로 쉽게 흔들리지만, 한 번 흔들린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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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을 감수하는 투자와 은행의 핵심 비즈니스 구조인 만기 전환이 금융 시스템의 중심에 있고, 두려움에 너무 쉽게 노출되는 인간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세계는 계속 금융위기의 위협에 노출될 것이다. 불행하게도 금융위기는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다. 4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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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다른 나라들의 저축 덕택에 매우 과분한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외국에서 미국으로 자금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자국의 저금리와 부족한 투자 기회에 불만을 느낀 글로벌 투자자들이 좀 더 나은 투자 기회와 상대적으로 안전한 이자 수익을 노리고 해외, 즉 미국으로 유입됐다. 당시 글로벌 시장에는 적당한 수익을 제공하는 자산에 대한 엄청난 투자 수요가 끊임없이 있었는데 벤은 이런 현상을 "세계적인 저축 과잉"이라고 지칭했다. 바로 이것이 금융위기란 불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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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계산했을 때, 모든 서브프라임 모기지 소유자가 채무를 불이행하더라도 그에 따른 손실은 그리 큰 규모가 아니어서 주요 은행과 기타 채권자들이 대부분의 손실을 완충자본으로 쉽게 소화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이 위의 계산 방식은 모기지가 금융 시스템 전반에 걸쳐 금융 공황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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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금융기관의 자본금 규정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규제가 너무 약하다는 것이 아니라 규제 대상이 너무 좁게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가장 무분별한 모기지 투자와 불안정한 자금 조달 기반을 가지고 있는 금융기관들이 가장 적은 완충자본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금융기관들 대부분이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68p
제4장 공황, 현실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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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먼브러더스 사태가 발생하기 전, 금융위기는 이미 1년 이상 계속되고 있었지만, 많은 미국인은 여전히 금융위기가 리먼브라더스의 붕괴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리먼브러더스 붕괴는 그 이전에 일어난 모든 금융위기를 무색하게 했고, 이후 발생한 모든 사태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리먼브러더스 붕괴는 단순히 금융 시스템이 취약해지는 원인을 제공했다기보다는 결과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1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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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몇 달 동안 꺼려왔던 금융 회사 주식에 대한 일시적인 공매도 금지를 증권거래위원회에 마지못해 요청했다. 금융기관 주식에 대한 공매도 금지는 극단적인 시장 상황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기업들에 대한 공매도를 금지하자는 아이디어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마치 부정적인 평가를 금지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장의 자신감을 훼손시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173p
제5장 보이지 않는 신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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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9개 대형 은행이 모두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낙인 효과를 걱정할 필요가 사라져 모든 과정이 원활히 진행됐다. 이날 오후에 9개 대형 은행이 모두 TARP의 지원을 받아들이면서 주식시장은 하루 변동폭으로는 역사상 최대폭 상승했다. 이후 몇 달 동안 우리는 거의 700개 중소형 은행들에 매우 빠른 속도로 공적자금을 투자했다. 이는 전체 은행 시스템에 대한 자본 확충과 안정화를 위한 매우 중요한 조치였다. 20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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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금융 정책 당국은 우리보다 좀 더 정통적인 방식으로 부실을 초래한 은행 시스템에 접근했다. 부실 은행을 국유화하거나 대다수가 받아들이기 힘든 징벌적인 조건을 적용하는 내용이어서 아주 소수의 은행들만 이 조건에 동의해 공적자금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이후 수년간 유럽 은행 시스템은 상당히 걱정스러운 정도로 자본이 부족한 상황에 처했으며, 유럽의 경제 회복 속도는 미국에 비해 매우 느렸다. 2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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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적으로 볼 때 정책 당국의 금융기관 개입은 금융 시스템을 무너뜨리기보다는 금융 시스템을 작동시킴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추가적으로 상당한 규모의 직접적인 투자 수익을 안겨주었다. 스트레스 테스트는 20개월간의 전통에 비하면 다소 용두사미 같은 실망스러운 결론으로 마무리됐으나, 리먼브러더스 같은 사태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시장에 안겨주었다. 2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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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P 기금을 지원 받은 오바마 행정부의 조치들은 분명한 효과를 보였다. 하지만 NBC 생방송 뉴스에서 릭 산텔리는 공짜로 얻어먹는 집주인들을 위한 긴급구제에 항의하면서 새로운 반정부 티파티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반대로 진보 좌파에서는 압류 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대응이 늦고 미비하다며, 이는 실물경제에 대한 배신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일반인들이 그 효과를 체감하기까지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239p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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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시사평론가들이 최악의 상황들을 가정하고 예상하는 경향이 잇는데,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비판론자들은 당시 우리가 취한 조치들이 대규모 환매 사태, 짐바브웨식 초인플레이션, 그리스식 부채 위기, 수조 달러의 구제금융 비용, 구제할 수 없는 좀비 기업들에 영향 받는 일본 금융기관, 심지어 미국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소멸을 향한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이 예상한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시행한 정책들 덕택에 비평가들이 우려한 그 어떤 일이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2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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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도 금융위기를 완전히 예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금융위기는 감독당국과 정책 입안자들이 필연적인 망각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인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금융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데, 신뢰만큼 깨지기 쉬운 것은 없다. 월가의 과도한 레버리지와 위험부담을 억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러한 과도한 레버리지와 위험부담은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과도한 낙관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감독당국과 정책 입안자들이 이런 광풍에서 자유롭기는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비이성적인 두려움뿐만 아니라 비이성적인 과열에도 쉽게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시장이 상승할 때는 과도하게 상승하고 하락할 때는 과도하게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 광풍과 공황은 둘 다 모두 전염성이 있다. 2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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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가 나타나기 전에 담으과 같은 준비들이 되어 있었으면 위기 상황이 덜 심각해졌을 것이며 금융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관성 있고 좀 더 공정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첫째, 금융감독당국의 규제가 좀 더 통합적이고 시중 은행 이외의 일반 금융기관에 대한 통제력을 갖췄어야 했다. 둘째, 금융감독당국이 금융 붕괴를 막기 위해 압도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초기부터 금융 시스템에서 자체적으로 구제금융을 실시할 수 있도록 보장되는 메커니즘이 정착되어 있었어야 했다. 25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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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은 금융위기에 대응할 재정 정책의 자유재량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인프라를 개선하고 유행성 전염병과 기후 변화 등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어렵다. 사회보장제도를 안정시키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영구적으로 세금을 감면해줄 만한 여력 또한 없다.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전부터 심각해져온 소득 불평등 문제, 중산층 불안 문제, 기타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금융위기로 인해 이런 문제들은 더 악화됐다. 그리고 지속 불가능한 예산 적자는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우리의 능력을 저해했다. 2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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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대형 은행들이 파산 직전의 상황에 봉착했을 때 연방예금보험공사가 해당 은행의 부채를 완전히 보증해줘 혼란스럽지 않게 해당 금융기관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납세자들에게 손실을 입히지만, 위기가 종식된 이후 연방예금보험공사가 금융 산업에서 발생한 손실을 회수하면 결과적으로는 이익이 나게 마련이다. 반대로 금융위기 상황에서 채권자들에게 채무를 탕감하게 하면 금융 산업 전체의 공황이 가속화되고 다른 금융기관들도 붕괴할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납세자들의 손실을 훨씬 크게 만들 뿐이다. 2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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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예금보험공사 모델이 제대로 작동하는 이유는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금융기관들이 미리 연방예금보험공사에 보험료를 납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융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대가가 예상한 것보다 더 커지면 금융업계가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해왔기 때문이다. (중략)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 금융기관에 부족한 자금을 지원해줘도 이것이 납세자의 부담으로 남는 게 아니라 위기가 해결된 뒤 결국 금융기관이 상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면 위기 관리자들이 공공자금을 사용할 재량권을 좀 더 과감하게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2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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