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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재난 국가

완독일
2021/03/24
카테고리
사회
불평등
작가
이철승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리뷰
4 more properties

프롤로그

나는 벼농사 생산양식의 일부로서 형성된 가족 세대 간, 그리고 또래 세대 내부의 협업 시스템이 동아시아(시민)사회의 기원이며, 이 협업을 통한 농업기술의 표준화 및 평준화 시트템이 동아시아의 마을 기업에서 축적되어온 인적 자본(혹은 협업-관계 자본)의 핵이라 주장한다. 29p
두번째의 주장은, 동아시아 국가의 존재 이유가 '재난 대비 및 구휼'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재난 대비 국가 또한 쌀 경작 문화 및 생태적 환경과 상호작용해온 동아시아인들의 '필요'로부터 출현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29p

1장 동아시아 국가의 기원

동아시아인들이 쌀에 중독된 더 근본적인 이유는, 첫번째 쌀의 생산력 때문이다. 쌀은 단위 면적당 생산량과 인구 부양력이 다른 어떤 곡물보다 높다. 단위 면적의 수확량이 밀이나 보리의 두 배가 넘는다. 두번째 이유는 그 영양가 때문이다. 쌀은 영양분에 있어서도 다른 곡물을 압도한다. 비타민과 철분 정도만 보출해주면, 쌀은 사실상 육류 없는 삶을 가능케 해준다. 쌀은 비타민을 제외하고는 모든 영양분을 다 갖추고 있는 완전식품에 가깝다. 51p
이러한 왕의 '부덕함의 인정'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나는 동아시아 군주의 자연재해, 특히 농사와 관련된 재해에 무한한 책임 의식이, 동아시아 국가와 사회의 '협약'에서 기원한다고 본다. 그 협약의 내용은 무엇인가? 바로 동아시아 쌀 경작 지역, 특히 홍수와 가뭄이 번갈아 급습하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씨족 단위 협력과 연대 시스템을 초월하는 더 상위의 연대스왑기구를 만들 때의 '재난 보호 협약'이다. 국가는 재난 시기 피해 국민과 지역을 구휼하고 농업 생산 시스템을 보존해야 하며, 이다음 재난이 오기 전에 방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73p
가뭄은 벼농다 체제에 태풍, 홍수와는 다른 종류의 도전을 야기한다. 태풍과 홍수가 짧은 시간 공동체를 타격하는 원 타임 쇼크라면, 가뭄은 장기전이다. 태풍과 홍수는 단 며칠을 지속하며 이재민을 속출시키고 작물이 눕거나 뽑혀 나가는 피해를 양산한다면, 가뭄은 아주 천천히 작물과 농심을 누렇게말라 죽인다. 전근대 사회에서 태풍과 홍수는 피해자에 대한 즉각적인 구휼 시스템, 즉 이재민에 대한 긴급재난구호와 같은, 레이저로 타기팅하는 것과 같은 선별복지를 필요로 했다면, 가뭄은 모든 농민에게 장기적으로 물을 공급해주고 식량이 떨어졌을 때는 환곡을 준비해야 하는, 보다 보편적인 재난 대비 및 복지 시스템을 필요로 했다. 태풍과 홍수가 고용, 실업보험을 필요로 했다면, 가뭄은 재난기본소득을 필요로 했다. 84p
재난은 양날의 칼이다. 국가는 손쉽게 시민사회의 동의와 정당성을 획득할 수 이지만, 재난 대처에 실패하면 사회의 동의는 급속히 철회되고 정당성은 빠르게 침식된다. 사회의 대안 세력들은 재난 시기 무능한 국가와 그 리더들의 능력에 회의를 품는 정도를 넘어 반역을 도모한다(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시도할 것이다). 재난에 피폐해진 시민들은 새로운 메시아를 꿈꾸게 되고, 대안 세력에게는 국가를 접수할 기회의 공간이 열리게 된다. 107p

2장 벼농사 생산체제와 협업-관계 자본의 탄생

동아시아 소농들은 '각자' 소유하고 있는 논을 '함께' 경작한다. 이 공동노동을 통해 평수리 주민들은 서로의 논에 손발을 담그고 물길을 내며, 서로의 논에 대해 속속들이 파악한다. 나의 노동이 그의 논에 투여되었고 그의 노동이 나의 논에 투여되었으니, 그의 산물에 나의 피땀이 어려 있다. 남이 수확하는 모습을 보며 '네가 그만큼 일했으니 그만큼 수확하는 건 당연하지'라고 수긍할 수가 없다. '네가 그만큼 수확하는 건 다 내 덕이야'라고 생각하게 된다. 126p
벼농사 마을 소농들 사이의 수확량 경쟁은 끝이 없었다. 이러한 경쟁은 조씨와 박씨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얼마 안되는 몇 마지기 논에 낮밤을 가리지 않고 끝없이 노동력을 투하했고, 서로의 논과 농법을 눈여겨보며 더 좋은 농법을 거듭 시도하는가 하며, 새로운 종자로 실험해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벼는 이러한 농군들의 노동 투하와 실험에 더 높은 수확량으로 정직하게 보답했고, 벼의 생산성은 농군들끼리의 경쟁을 더욱 부추겼다. 128p
그들은 밀농사 지대의 소비자들이 커피숍에 혼자 앉아 있을 확률이 더 크며, 의자가 통로에 놓여 있을 경우 치우고 나갈 확률이 더 높음을 발견했다. 이에 비해 벼농사 지대의 소비자들은 그룹을 지어 앉아 있을 확률이 더 크며, 통로에 놓인 의자를 그대로 두고 좁은 틈사이로 빠져나갈 확률이 더 높았다. 집단주의 문화에 길들여진 벼농사 지대의 개인은 촘촘한 사회관계와 구조에 오랫동안 적응한 결과, 주어진 상황을 바꾸기보다 그 상황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예측하지 못한 도전을 타개한다. 반면,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 성장한 밀농사 지대의 개인들은 주어진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배치한다. 129p
그런데 저소득자 및 낮은 직업 지위를 가질수록 행복도가 급속히 저하되어 밀농사 지역의 동일 집단에 비해 훨씬 더 불행하다고 느꼈다. 다른 모든 조건이 유사했을 때 밀농사 지역의 주민들은 덜 불행해하거나, 심지어는 사회경제적 지위의 높낮이에 따라 자신들의 행복도를 결정짓지 않았다. 134p
이 차이는 어디서 나올까. 바로 이웃과의 비교와 질시로부터 온다. 벼농사 지역은 공동노동 조직을 통해 서로 긴밀하게 엮여 있지만 소유는 따로 하는 공동생산-개별 소유 시스템이다. 벼농사 지역의 두레 조직이 여타 공유 경제 시스템(예를 들면 어촌의 '갱번')과 결정적으로 대비되는 점이다. 134p
쌀 재배 지역 주민들은 밀 재배 지역 주민들에 비해 물질적 소비(경제적 지위)와 육체적인 외양에서 자신들의 처지를 타인과 심하게 비교하고 있었다. 그들이 비교하는 대상은 일반적 타ㅏ가 아닌, 바로 주변 친구들과 일터의 동료들, 심지어는 가족들이었다. 결론적으로 벼농사 지역 정주민의 행복은 관계로부터 온다. 나와 내 자식이, 내 가족의 수확량과 소득과 지위가 이웃보다 더 많고, 더 높고, 우월해야 한다. 내 행복의 근원은, 나라는 독립된 개인의 내면의 충만감이 아니다. 내가 남보다 더 잘났다는 것을 남의 눈으로 남의 입으로 확인받을 때, 동아시아 벼농사 지역의 정주민은 더욱 행복해한다. 135p
이러한 역설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나는 벼농사 지대의 상대적으로 높은 불신은, 출구가 없는 닫힌 네트워크 안에서 공동생산-개별 소유라는 이중 구조가 만들어내는 끝없는 경쟁과 질시의 매커니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본다. 경쟁과 비교, 질시의 문화는 행복의 정보뿐만 아니라 이웃 및 동료와의 신뢰 구조 또한 결정짓는 것이다. 138p
벼농사 지대의 협업은 솔직 담백한 자유주의의 개인주의와는 거리가 먼, 복잡한 이중의 심리 구조를 만들어낸다. 신뢰가 없다고 해서 협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불신이 내재된 협업은 간섭과 상호 감시, 의심이 일상화되는 피곤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사적 소유가 허용된 집단주의 사회의 인간은, 노동의 투여를 공유하는 생산관계 때문에 서로를 더 믿을 수 없게 되는 복잡한 존재인 것이다. 139p
두레꾼의 기본 조건은 "어떤 노동에서든지 다른 농부와 대등하게 일을 처리" 할 수 있는, 남들에게 처지지 않는 농사 기술의 습득이었다. 각 논의 주인들은 새참과 저녁 술자리를 준비하면서도 자기네 논에서 장정들이 제대로 일하는지를 '티나지는 않지만, 은근하게' 모니터링했다. 143p
서구의 마을 간, 도시-농촌 간 교환경제에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먄, 동아시아의 농촌 마을에는 생산기술의 표준화를 조율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 이 동아시아 농촌 공동체는, 인류가 만들어낸 수많은 '조직'과 '시스템' 중에서도 가장 오래,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해온 '마을 기업'인 것이다. 146p
한국의 기업에서는 어떻게 물건을 만들고, 팔고, 계약서를 쓰고, 대차대조표를 작성하지를 '마치 이미 알고 있었던 듯이' 수행"했다. (중략) 이들의 이러한 '협업의 기술'이 어디서 비롯되었겠는가? 이들은 가족과 세대를 가로지르는 공동노동 조직으로 단련된, 바로 그 평수리의 아이들과 청장년들이었다. 147p
동아시아 벼농사 체제의 두 원리는 이로써 동아시아의 현대자본주의 기업에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다. 농촌에서부터 나이 많은 동네 어른을 우대하며 그들에게서 농사 기술을 전수받았던 농민공들은 연차가 올라갈수록 더높은 급여를 받는 연공제의 원리를 쉽게 받아들였다. 또한, 같은 작업장과 사무실에서 한솥밥 머으며 기계와 펜대를 돌린 동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생산성 차이에 대해서는 적당히 눈을 감았다. 151p
베버는 심지어 중국의 언어 체계가 합리적 추정의 사고를 저해하며, 그로 인해 (서구와 같은) 발전을 달성할 수 없으리라고 보았다. 오늘날 중국과 동아시아의 발전을 보고 이들이 무어라 이야기할지 궁금하다. 서구 지식인들의 '인종적 편견'에 가까운 이러한 편향은, 결국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이론의 실패로 귀결되었다. 159p
동아시아의 성공을 설명하는 데 실패한 이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박정희와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이끈 개발국가의 산업정책과 금융정책이 동아시아의 성공을 가능하게 했다는 주장(개발국가론 혹은 발전국가론이라 불리는)이 오늘날 우리가 받아들이는 대표적인 성공 이론이다. (중략) 교육을 중시하는 유교가 인적 자본을 축적시켜 자본주의의 발전을 이뤄냈다는 설명은, 과거 시험에 목숨 거는 동아시아인들의 문화적 특징을 부각해 오늘날 그들이 성취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교육열' 근본주의다. 나닌 이 기존의 두 이론이 틀렸다고 보진 않지만, 그렇다고 정확하게 타깃을 포착했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161p

3장 코로나 펜데믹과 벼농사 체제

신뢰와 자발적 결사체로 측정되는 서구의 사회적 자본론으로 벼농사 체제의 특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찾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동아시아는 애초에 그러한 (개인의 연대체인) '조합 혹은 결사체로서의' 사회적 자본이 출현한 사회도, 그러한 사회적 자본을 통해 국가와의 관계가 형성된 사회도 아니다. 존재하지 않던 민주적 시민성과 개인성이 코로나 펜데믹을 맞아 갑자기 작동할 리도 없다. 독립된 개인들의 신뢰를 동반한 연대체로서의 시민사회, 각종 믿음 혹은 이해공동체로서의 중간 집단들에 의해 통제되는 자발적 시민사회의 전통이 동아시아에 갑자기 들어설 리는 없는 것이다. 바로, 벼농사 체제에서 작동해온 마을 씨족 공동체의 원리를 이해해야 이 퍼즐이 풀린다. 169p
동아시아 사회의 '사회적 조율'은 벼농사 체제에서 유래하는 '서로에 대한 간섭과 규율'을 통해 서로의 기술력, 즉 생산성을 평준화하고 서로의 농법을 표준화하는 시스템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내 논에 손발을 담그고 내 모를 심는 이웃의 모심기 기술과 방법이 서로 다르면 내 농사를 결국 망치게 되므로, 내 이웃의 모심기 가술과 방법이 그들의 것과 동일하지 않으면, 내 자식들은 이웃의 농사를 망치는 주범으로 전락한다. 따라서 내 자식들에게 제대로 농사일을 가르쳐야 하는 훈육의 주체는 바로 나다. 부모가 자식들의 기술 습득을 관리, 감독하고 이웃 간에, 비슷한 연배의 공동노동 구성원들 간에 기술의 평준화와 표준화를 서로 '조율'하는 수직-수평 훈육 및 조율 시스템이 결합된 형태가 동아시아 '사회적 조율'의 기본 틀이다. 173p
쌀을 주식으로 먹는 아시아 국가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특히 동아시아 국가들은 최초 발생국인 중국과 인접해 있으면서도 코로나 펜데믹을 잘 통제하고 있다. 서구의 지식인들은 이에 대해 권위주의에 순응하는 복종적 성향을 가진 시민들 때문이라고 성급히 결론 내린다. 비서구를 서구 우월주의 시각에서 열등한 문화로 취급하는 '오리엔탈리즘'이 짙게 배어 있는 설명이다. 193p
마스크를 끼지 않고 거리두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눈총과 핀잔이 가고 싫은 소리가 가면서, '욕먹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스크를 구비한다. 서구의 개인주의자들은 이러한 사회적 조율 시스템을 국가의 개인 권리 침해에 대한 굴종 내지는 길들여진 주체의 복종이라고 바라본다. 난센스다. 자신들의 사회계약론만 사회계약이고, 다른 생태적 환경과 문화를 지닌 사회의 사회계약 원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재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권리를 스스로 자제하고, 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부과되는 협약을 준수하는 것이 벼농사 체제하 재난 대비 매뉴얼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196p
밀 문화권의 국가가 근대 공화정의 철학을 수립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다른 모든 것의 우위에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생산의 계약이 개인과 자연(=신) 상에 먼저 맺어졌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 이 자리에 애초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동아시아와 달리, 서구의 많은 지역에서 대규모 (민족)국가가 한참 뒤에야 출현한 이유이기도 하다. 거대 국가 없이도, 공동체가 생산 시스템을 꾸리는 데 큰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201p
국가는 동아시아 문명화 함께 출현하고 성장했다. (중략) 동아시아의 국가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인 존개가 아니라, 벼농사의 성패를 포함해 그에 딸린 식솔들의 생계와 복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행위자다. 벼농사 문화권, 그중에서도 장마전선과 태풍이 집중적으로 물 폭탄을 쏟아붓는 동아시아에서, 국가는 생산의 조직과 인프라를 책임지는 중심체다. 동아이사의 국가는 서구의 국가와 존재 이유부터 다른 것이다. (중략) 쌀 문화권의 국가는 다른 모든 것을 하지 않더라도 (1) 재난 대비 (2) 구제와 구휼 (3) 극복과 치유라는 세 가지 업무를 제대로 수행해야 국가로서의 존재 이유를 입증할 수 있다. 202p
민주주의를 오래 경험하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잘 제도화한 나라일수록 (인구 대비) 코로나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더 많지만, 불평등이 낮은 나라일수록 민주주의가 코로나 확진자와 사망자 수를 오히려 줄이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곧 미국과 같이 민주주의를 오래 경험했지만 시장의 불평등을 치유하는 데 인색한 나라들에서, 흑인과 같은 빈곤 계층은 코로나의 위험에 더 크게 노출된다. 존스 홉킨스 대학 발표에 따르면, 시카고시의 흑인 인구는 전체의 3분의 1 가량이지만, 시 전체 코로나 확진자의 절반을 그리고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 수의 75%를 차지했다. 208p

4장 벼농사 체제와 불평등의 정치심리학

먼저 밀 문화권의 개인주의의 경우 가구 간이나 마을 단위 협업이 아닌 개별, 가구별로 생산 단위가 꾸려지고, 따라서 생산물에 대한 소유 또한 철저히 개별 가구 단위로 이루어진다. 더 많이 생산하고 싶은 자는 더 많이 뿌리고 더 많이 키워서 더 많이 거두면 된다(물론 더 많은 땅이 필요할 것이다-제국주의는 밀 문화권에서 나왔다). 각자 뿌린 대로 거두는 보상 체계는 인간의 노동에 비례하여 자연(신)의 수혜를 배분하는 시스템이다. 뿌린 것에 비례해서, 노동한 시간과 땀에 비례해서 자연이 보상해주니 자연을 경배할 수밖에 없다.(중략)개인주의의 식량 생산 시스템에서 자연은 자연스럽게 신으로 진화했다. 여기에 가톨릭의 사제와 같은 중간 매개자가 끼어들 수는 있지만, 조상신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217p
부모에서 자식으로 가족 세대 간에 전해지는 기술의 전수 또한 유교적 가부자제와 같은 엄격한 가족 내 질서 체계에 의해 반강게적으로 주입될 가능성이 높다. 개량된 기술이 '마모'되거나 '변형'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전되기 위해서는,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을 뛰어넘는 수준의 윤리적, 문화적 강제 기제를 필요로 한다. 이렇듯 '씨족의 시민'을 키우고 그에 걸맞은 공동체 윤리를 주입하는 1차적 주체는 부모였고, 따라서 부모가 가르치는 농사 기술과 행위 윤리는 동아시아적 사회화의 근간이었다. 219p
'부모도 없는 놈'이라는 동아시아적인 욕설은 있지만, 서구권에는 없는 이유. 부모가 없다는 건 사회적인 구실을 못한다는 의미.
밀 경작과 쌀 경작 중 어느 사회가 더 불평등해질 가능성이 높을까? 일견, 밀 경작 사회가 더 불평등해질 것처럼 보인다. 밀 경작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개별 생산 시스템이 개인주의 문화를 발전시킬 것이고, 이런 문화에서 개별, 가구별 수확과 축적에 대한 정당화 기제(능력주의) 또한 더 잘 발달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밀 문화권에서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 가톨릭교회의 인증과 교리 해석의 독점권을 거부하고 개인과 신의 직접적 교통을 선언한 루터와 그를 계승한 칼뱅에게-중간 매개자로서 사제의 역할을 제거한 프로테스탄트들에게-신의 은총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수확량'과 '축적량' 밖에 없었다(Weber 1992). 222p
이에 비해 집단주의적 협업이 발달한 쌀 경작 사회는 생산 과정과 생산량에 대한 상호 감시 및 경쟁 기제가 발달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개별 농가의 과잉 축적에 대한 견제 시스템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더구나 쌀 경작 사회는 공동체 내부의 경쟁과 비교 및 기술의 상호 모방 문화로 인해 집단 내 불평등이 장기간에 걸쳐 낮아질 것이다. 또한 쌀 경작 사회의 급속한 인구 팽창은 가구 단위에서 아랫세대로 전승되는 부의 양을 계속해서 잘게 쪼개는 역할을 한다. 223p
결국 쌀 문화권에서 재산 축적은 생산을 조직화하는 국가, 더 정확히는 국가를 점유하고 있는 학연-지연-혈연 네트워크에 누가 최초로 다리를 놓는 기회를 누렸느냐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러한 국가를 점유한 세력과 국가의 통제권에 접근하려는 외부 세력 간의 공모가 쌀 문화권 국가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의 주요한 축이다. 이런 점에서 쌀 문화권의 국가는 불평등의 '조정 및 관리자'가 아니라, 불평등의 생산자이기도 한 것이다. 229p
이 순간, 벼농사 체제와 과거제도는 엮였거나 중첩되었다(Mahoney&Thelen 2009). 하나는 마을의 생산력 경쟁 시스템이고 다른 하나는 왕과 지방 호족 사이의 지배권력 경쟁 시스템이었지만, 평수리에서는 씨족들 사이의 경쟁 시스템에서 구사되는 포트폴리오 전략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보다 정확히는 씨족 마을 공동체의 닫힌 농업생산력 경쟁 시스템에, 과거를 통한 사회이동 시스템이 개입한 것이다. 이로써 마을의 신분 이동과 생산력 경쟁 시스템은 국가와 접속되었고, 국가의 지배 전략(Gramsci 1971) 안으로 포섭되었다. 235p
동아시아 소농 시스템의 문제는, 이 노동과정의 연대와 수확의 사유화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생산과정은 공유했는데 수확이 공유되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밀 문화권에서는 생산과정이 공유되지 않기에 서로의 수확량에 대한 정보가 불분명하다. 심지어는 각자 뿌리고 각자 거뒀기 때문에 서로의 수확량에 무관심하다. 쌀 문화권에서는 반대 상황이 발생한다. 생산과정에서 서로의 '출발점과 최초의 노동 투여량'을 확인했기 때문에 수확량에 대한 상호 관심의 네트워크가 저절로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서, 옆 논의 벼가 크는 속도와 내 논의 벼가 크는 속도를 비교하는 네트워크가 구성되는 것이다. 논과 밭을 같이 갈아엎고 파종을 함께 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말이다. 238p
한국인이 비교하는 이유
벼농사 체제의 '공동생산 네트워크'로부터 유래하는 '네트워크 경쟁'의 사회심리학적 특정은 무엇인가. 첫째는 경로 의존성으로 인한 경쟁 문화의 무한 반복과 강화다. 둘째는 상호 의존 및 경쟁과 함께 강화되는 '질시의 심리학'이다. 셋째는 상호 의존과 경쟁이 출구 없이 되풀이되며 만들어지는 신뢰와 불신의 이중적 공존이다. 239p
먼저 공동생산과 협력의 문화는 강한 평등화의 욕망을 수반할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 역사에 존재하는 수많은 농민의 난과 혁명의 시도에서도, 서구와 비교할 때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는 불평등(현대 중국을 제외하면)에서도 도출될 수 있는 가설이다. 집단 수준의 평등화에 대한 열망은, 많이 가진 자와 그들의 소유에 대한 질시 및 사회정치적 차원의 문제 제기로 이어진다. 240p
반면, 생산이 아닌 수확 및 보상 단계에 방점을 찍으면 전혀 다른 가설이 도출된다. 강력하게 구조화된 닫힌 네트워크에서의 무한 경쟁, 그 쳇바퀴 속에서 서로의 수확물을 확인하면서 갖게 되는 질시의 문화, 그로 인해 표면적 신뢰와 내면적 불신의 공존이 가져오는 이중적 인간관계는 '상대적 불평등'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동아시아적, 한국적 생산체제는 개인 단위에서는 차별화를 열망한다. 아주 강렬하게. 241p
동아시아 벼농사 체제의 공동생산 시스템은 평등화를 향한 강한 집단적 심리 기제를 발동시키지만, 개별 소유 시스템은 무한 경쟁과 불신, 불평등에 대한 강렬한 개인적 욕망을 자극한다. 동아시아 벼농사 생산체제는 평등화와 불평등화에 대한 열망이라는, 이중의 심리 구조를 생성하는 것이다. 241p
<그림 4-3>은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고 부를 달성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쌀 경작을 더 많이 하는 지역일수록 부정적으로 답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들은 '부는 모든 사람에게 충분할 만큼 증대된다'리고 믿지 않고, '다른 사람을 희생해서만 부유해질 수 있다'라고 믿을 확률이 높았다. 어떻게 이런 이중의, 모순적인 조합이 가능할까? 바로 벼농사 체제의 공동생산-개별 소유 시스템의 유산이다. 함께 생산했으니 수확이 엇비슷해야 공평하지만, 그렇다고 공동체가 함께 부유해지는 사회를 꿈꾸지도 않는다. 쌀 경작의 정도가 높은 지역일수록 이러한 이중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것은, 평등화와 차별화에 대한 열망이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벼농사 체제 정주민의 성정과 얼추 일치한다. 244p
한국사회의 이중적인 평등 지향 태도에 대한 명쾌한 설명. 수년 만에 미스테리가 풀린 느낌. 우린 질투하면서도 우월하고 싶다.
밀 문화권 국가드에서 복지국가의 재분배를 통한 개입 이후에는 (쌀 문화권에 비해) 불평등이 더 낮아지는 경향을 보여준다. 시장 소득을 기준으로 한 불평등에서는 쌀 문화권 국가들이 낮은 불평등 수준을 보이지만, (국가에 의한 세금 징수와 재분배를 반영한) 가처분 소득에 바탕을 둔 소득 불평등 지표에서는 밀 문화권일수록 그 정도가 더 낮은 것이다. 251p
쌀 문화권의 국가는 재난 시기에 잘 작동하면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선별적 구휼자이다. 쌀 문화권의 자영 소농들에게 재난 시기가 아닐 때 과도하게 활동하는 국가는 수취국가로 취급된다. 해준 것은 별로 없으면서 해마다 과중한 세금을 걷어가는, 약탈자 탐관오리 국가인 것이다. 재난의 효율적인 극복에 만족하던 시민들은 조금 오른 재산세나 ㅗ득세에 분노하여 피켓을 들고 거리를 메운다. 이들은 동아시아 소농들의 후예다. 259p
현대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이 두 문화권(영미권과 쌀 문화권)에서 맹위를 떨치는 데는 배경과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두 문화권 모두 국가의 (재분배) 역할을 최소한으로 유지시키고자 했던, 국가에 대한 낮은 기대를 공유한다. 너희들은 (재산 소유권의) 보호, 감시와 생산의 조율이라는 맡은 일만 해라, 그리고 우리가 뭘 하든 간섭 말아라. 하지만 그 맡은 일을 제대로 못 하면, 그 맡긴 일 이상을 하려 할 경우엔 각오해라, 이러한 최소주의 국가관의 결과는, 영미권과 동아시아에서 모두 보편적 복지국가으 저발전으로 귀결되었다. 260p
동아시아 농민에게 땅은 종교에 가까운 것이다. 그 땅을 내려다보는 부모와 조상의 묘소 앞에서 그들은 '입증 책임'을 완수한다. 루터와 칼뱅의 프로테스탄트들처럼. 그런데 이러한 동아시아 씨족 종교의 터전인, 동아시아 농민들은 필사적으로 제한된 땅에서 소출을 늘리는 한편, 새로운 땅을 개간하는 경쟁에 몰입한다. 도시로 이주한 동아시아 농민공들은 소출과 개간 경쟁을 건물 확보 경쟁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자산 취득 경쟁은, 노동은 넘치고 땅과 건물은 제한된 동아시아의 정주민들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벼농사 체제의 인구 증가 압력이 초래한, 불가피한 운명이다. 261p
자산이 중상층 소득 그룹의 '사회보험 욕구'를 꺾고 '재분배와 보편복지 체제에 대한 반대'를 강화시키는 경향은, 벼농사 체제의 유산이 길게 드리워진 한국 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부동산 자산이 사회보험 욕구를 제약하는 효과는 두 가지 '양극화' 경향을 촉발할 수 있다. 하나는, 중장년층 중 상당한 저축과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성장의 수혜'를 받은 자들은 사회보험 욕구를 내치는 동시에, 복지국가를 통한 재분배와 보편적 안전망 수립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이다. 내 곳간에 충분히 쟁여놓았는데, 굳이 국가에 세금을 더 내서 관아 곳간을 채워놓을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은 복지국가를 통한 재분배와 보편적 사회안전망 프로젝트에 오히려 더 강한 지지를 보내리라는 것이다. 267p
부동산 값 상승이 진보 정권에 치명타인 이유. 보편 복지와 큰 정부에 부정적으로 바뀌게 됨. 무주택자는 자산 격차에 분노한다.
자산이 없는 상층 소득 그룹일수록 선별복지에 대한 선호도가 낮아진다(즉 보편복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다). 이 그룹의 경우 자산을 통한 개인 수준의 위험 회피 수단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래 위험에 대비하여 현재의 고소득을 사회적 안전망을 통해 유지하려는 욕구가 크다. 하지만 하층에 수혜가 집중되는 선별복지 체제에서는 자신들에게 수혜가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선별복지에 반대하고 보편복지를 선호하는 것이다. 269p
자산이 더 많이 쌓일수록, 고소득층의 경우 미래 소득을 상실했을 때의 위험에 대비해 개인 수준의 사적 보험을 마련할 가능성이 높아짐을 의미하고, 따라서 선별주의 복지정책에 대해 찬성 입증을 견지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중략) 부동산 자산 축적을 통해 사회보험 욕구가 거세된 고소득층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즉 자신들에게 수혜가 돌아오지 않는 선별적 복지체제를 최소한의 수준으로 유지하려 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자산 축적(및 상속 욕구)을 저해하는 높은 세금에 반대할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부동산 가격의 폭등을 막지 못하면, 어느 정도의 보험 욕구를 갖고 있던 중산층과 중상층이 보편복지 동맹에서 이탈하여 선별복지 지지 세력으로 전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271p
그 결과(부동산 폭등)는 보편복지 안전망의 부실화 혹은 형해화이고, 재난 시기 간신히 구휼만을 할 수 있는, 최소주의 재난 대비 국가의 존속이다. 부동산 가격의 폭등과 보편복지 국가 프로젝트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272p

5장 연공제와 공정성의 위기

이 당시(2000년대 중반) 임금 상승은 어느 정도였는가? 이 무렵 노조가 존재하는 사업장의 임금 프리미엄은 금융위기 이전(1.7%) 대비 3배(5.1%)에 달했고(김장호 2008), 연공제 임금 테이블의 기울기의 경우 최초 입직 노동자 대비 30년 후 임금배율이 3.3배로 일본(2.7배)과 서유럽(1.7배)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한국노동연구원 2015). 295p
혹자는 연공-세대-인구의 착종 현상으로 인한 청년 고용 위기와 비정규직 문제가 (일본의 예를 들며)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와 함께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노조와 세대 네트워크로 강력하게 조직화되어 있는 현 베이비붐 세대 또한 세월의 힘을 버텨내지는 못할 것이며, 다음 세대의 차례가 되면 인구 압력으로 인한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소되리라고 보는 것이다. 이 예측은 연공-세대-인구의 착종이 남기는, 한 가지 중요한 구조적, 제도적 유산을 간과한다. 그것은 상층 베이비붐 세대 네트워크가 제도화시킨, 극도로 가팔라진 연공제 임금 테이블의 기울기와 그로 인한 불평등의 영속화다. 32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