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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길을 본 사람들

날짜
2023/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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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투자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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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흰 영역과 검은 영역이 있는데, 그 사이에 꽤 넓은 회색 지대가 있습니다. 큰 돈은 이곳을 가야만 벌 수 있어요". 최근 한 대표님이 자신이 강연에서 들은 말을 전해주셨다. 이 말을 한 사람은 국내 굴지의 금융회사를 세운 한 회장님. 발화자를 알고 나니 발언에 무게가 확 실리는 거 아닌가.
여기서 '회색'은 풀이하기 나름이다. 삐딱하게 보면 불법과 합법 사이의 애매한 영역으로 가라, 다른 말로는 교도소 담장을 걸으라는 얘기. 긍정적으로 보면, 이미 실현된 현실과 오지 않은 미래 사이, 딱 반 걸음 앞선 길을 가라는 얘기다. 여하튼 중요한 건 '틈'이다.
대기업 직원과 스타트업에 투신한 사람을 만나 얘기하면 가장 큰 차이점이 이거다. 빳빳한 셔츠 위에 사원증을 건 분들은 '이미 좋은 건 세상에 다 나와서 할 게 없다'고 한다. 30년만 일찍 태어날 걸, 하늘은 어찌하여 나를 낳고, 삼성도 낳았는가!
반면 스타트업이 보기에 세상은 바보들의 행진이다. 너무 허술해서 '해결' 할 게 많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바보거나 좋게 봐도 게으른 탓. 남들이 보지 못한 넓다란 회색지대를 찾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풀기만 하면 기하급수적인 성장(J커브!)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틈에서 큰 돈을 버는 걸 증명한 존재가 있다. 연봉으로 수 조원을 받아가는 부자들, 헤지펀드다. 이 자본주의의 정수를 만든 이가 역설적으로 레닌주의 단체서 활동했던 사회학자라는 게 아이러니. 주인공은 1900년생인 낯선 알프레드 윈슬로우 존스다.
1950년대 전후의 경제학은 시장을 '완벽한 합리성'으로 굴러간다고 봤다. 하지만 외교관 신분으로 간 독일에서 공산주의자 여성과 살림을 차리고, 레닌주의 활동을 하다가 귀국해 사회학자가 된 사람의 눈으로 본 시장은 어떨까. 온통 부조리로 가득한 정글이다.
세상에 오류가 있다는 건 '올바르게' 행동하는 자에게 먹을 게 많다는 의미다. 100원이면 적당한 물건을 다들 200원에 사고판다면, 나는 2배 먹을 기회를 포착한 것. 두 아이의 아빠였던 알프레도 존스는 생계를 고민하다 지인의 돈을 모아서 펀드를 차린다. 좋은 주식엔 걸고, 나쁜 주식엔 공매도 치는 헤지펀드의 탄생이다.
이 펀드가 작동하려면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우선 시장에 비합리적인 가격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잘못된 가격에 공매도를 쳐서 먹고, 또 낮은 가격에 롱을 쳐서 먹는다. 두 번째는 시장보다 내가 보는 눈이 좋아야 한다. 두 가지 전제 모두 '시장에 비합리가 있다'는 조건이 성립해야 작동한다.
그래서 누가 맞았을까? 수익률로 보면 좌파 사회학자가 맞았다. 그의 펀드는 설립 이후 20년 동안 누적 5000%, CAGR 약 22%의 수익을 거둔다. 자본주의의 성인 반열에 오른 버핏에 비비는 수익률 성적이다. 옛 레닌주의자는 월가의 양복쟁이들을 무참히 박살냈다.
하지만 존스의 펀드는 시작일 뿐 끝이 아니었다.
급전이 필요한 대주주와 바에서 조용히 이뤄진 블록딜은 '시장은 모든 정보를 반영한다'는 교리를 비웃는다. 이렇게 마이클 스타인하트는 블록딜로 돈을 번다. 폴 사뮤엘슨은 원자재 시장의 비합리성, 타이거 펀드는 신흥국의 비합리성, 폴 튜더 존스는 '합리적 시장 가설'의 비합리성을 노려서 억만장자가 된다.
헤지펀드 매니저들이 유난히 사변적이고 인터뷰를 자주 하는 것도 이런 배경이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인간 사회의 비합리성을 포착하고 여기에 돈을 걸어서 증명해낸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금융시장판 과학자 같은 존재다. 단지 그 대가를 네이처지 수록이 아니라 달러로 받을 뿐이다.
이런 호걸들의 이야기가 어디있냐 하면.. 지금은 절판된 <헤지펀드 열전>이란 책에 수록돼 있다. 2011년에 나온 이 책은 약 10명의 전설적인 헤지펀드 매니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명저답게 역시 절판된 책인데,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출판사 에프엔미디어 김기호 대표님의 하사로 읽게 됐다.
이 억만장자들의 공통점은 세상을 삐딱하게 본다는 점. 금융업계의 스타트업 마인드다. 아이비리그에서 재무학을 공부하고 월가에서 일한 정통파보다 골방 철학자에 가까운 기인이 많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타트업은 경영학이 아닌 사회학에서 다뤄야 하는 '심리 상태'나 '세계관'이다.
자 이제 책을 다 읽었으니 '회색'을 찾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