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가 죽었다. 그것도 백주대낮에 총에 맞아서. 총기의 나라 미국도 아닌 일본에서 말이다. 대체역사물의 도입부 같은 사건이었다. 한국과의 질긴 악연으로 한국인의 뇌리에 박힌 이 일본 정치인은 떠날 때도 강렬했다. 아베 신조라는 정치인은 등장부터 퇴장까지 문제적이었다.
한국에서 기억하는 아베의 등장은 ‘이변’이다. 2006년 이후 6년 동안 6명의 총리가 바뀌던 혼란을 끝내고 아베 정권(집권 2기)이 들어섰다. 혼란과 무기력함, 일본 정치를 두 이미지로 기억하는 한국인들이 볼 때 강경 드라이브로 일관한 아베 정권은 돌출적인 정권이었다. 그동안의 일본 정치와 거리가 있는 ‘일본의 일탈’이란 시각이다.
도쿄에서 30년간 정치학을 가르친 한국인 학자의 생각은 다르다. 아베 정권은 일탈이 아니다. 오히려 일관되게 일본이 지향해 온 흐름 위에 서있던 정권이다. 이 주장이 맞다면, 아베라는 인물이 사라졌다고 해서 일본의 급격한 변화(한국의 관점에서 ‘정상화’)가 이뤄진다고 생각하는 건 섣부르다.
저자에 따르면 아베 정권은 2001년 고이즈미 전 총리가 깔아놓은 철로 위를 달리고 있다. 이미 2000년대 초부터 아베식 정치의 토대가 차곡차곡 쌓였던 것이다. 그 토대는 △자민당내 파벌 균형의 붕괴 △내각 통솔력의 비약적인 강화 △당내 인사권 장악으로 이뤄졌다. 고이즈미 전 총리가 집권한 6년 동안 완성한 결과물이다.
아베는 이 고이즈미 전 총리가 키워낸 후계자다. 고이즈미는 보통 9선 이상 의원이 맡는 간사장(사무총장 격)을 3선인 아베에게 맡기더니 2년 후에는 내각 2인자인 관방장관으로 세운다. 이후에는 총리 자리를 물려줘 전후 최연소이자 최초의 전후 세대 수상으로 만들었다.
이런 연원을 따라가다보면 아베 정권의 뿌리가 2001년 집권한 고이즈미 정권까지 올라간다는 걸 알게 된다. 중간에 민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사건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거의 20년 가까이 큰 궤적을 그리며 착실하게 달려왔다. 이렇게 달려온 자민당의 지향점은 명확하다고 말한다. 바로 개헌이다.
개헌을 위한 작업도 착실하게 이뤄져왔다. 다국적군을 지원하기 위해 자위대를 파병할 수 있도록 한 '테러 특별 조치법'이 통과된 게 2001년이다. 이후 국제적 분쟁이 있을 때마다 일본은 조금씩 파병 영역을 넓혀왔다. 이 움직임은 2014년에는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한 '해석 개헌'으로 이어졌다. 후속 조치로 2015년 안보법안이 입법됐다.
시간의 지평을 넓혀보면 아베내각은 '급변'이 아니라 (그들의 기준에 따르면) 정속주행하고 있는 셈이다. 아베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도 작가는 일본의 개헌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고 평가한다.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일부 극단세력의 주장에 불과했던 개헌이 이제는 비등한 수준까지 올라섰다고 전한다. 단순히 아베라는 문제적 인물이 만든 변화로 보기 어려운 큰 흐름이다.
아베 전 총리 암살 전에 쓰여진 이 책에서 저자는 그가 권력을 잃을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 비록 이후 기시다 현 총리에게 정권을 내줬지만, 아베 전 총리가 언젠가 다시 총리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저자는 자민당 내에서 아베에게 반기를 들 세력이 없다고 평가했다. 아베가 사라진다 해도, 아베파는 남아있으며 총리가 바뀌어도 총리교체일 뿐 정권교체는 아니라는 지적이다.
우리는 사람을 주목한다. 정치인이 뱉는 말과 그의 행동을 보며 그 나라의 방향을 가늠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까이서 일본을 지켜본 저자는 무대 뒤에 있는 구조를 가리킨다. 그들이 달려온 경로와 쌓아온 토대를 이해해야 진짜 목적지를 알 수 있다. 한 사람의 발언이나 돌출하는 사건에만 매몰되면 안되는 이유다.
아베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걸어온 선로는 남아있다. 그도 앞서간 정치인이 깔아둔 선로에서 일본을 끌고 간 한 등장인물에 그칠지도 모른다. 아베라는 맥거핀에 눈길을 뺏긴 사이에 우리가 놓친 건 무엇일까. 테이프를 되감아볼 때다. 아베가 사라진 이 시점에 <도쿄 30년, 일본 정치를 꿰뚫다>를 다시 펴봐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