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도 ‘팔자’가 있다. 땅 위에 사는 사람이나 기술, 문화는 바뀔 수 있다. 하지만 터잡고 있는 땅, 지리는 바꿀 수 없다. 한국은 유라시아 동쪽 끝 반도에 앞으로도 있을 것이고, 일본은 지진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미국은 광대한 중서부 평원에서 풍부하게 자라는 작물을 누릴 것이다. 포커 판에서 일단 분배된 카드를 무를 순 없다.
<지리의 힘>은 전세계 주요국의 지리를 담은 책이다. 한국에서 지리에 대한 책은 인기가 없는 편이다. 하지만 <지리의 힘>은 이런 시장 분위기를 뒤엎고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이후 많은 지리와 지정학을 다룬 책이 쏟아졌다. 한국 독자들에게 ‘지리의 세계’를 열어줬다고 할 만하다.
지리에 대해선 제국주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구 선진국이 가장 앞서있다. 무려 500여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후 수백년 동안 지구본을 돌려가며 세계를 침략하며 쌓은 지식의 힘이다. 처음에는 침략의 도구로, 이후에는 관리와 경영의 도구로 전세계의 지리를 파고 들었다.
지리를 보면 ‘세계 최강국 미국’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은 동서 양쪽은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막혀있고, 북쪽은 거의 텅빈 캐나다 남쪽은 국력에서 한참 차이나는 멕시코로 둘러싸여 있다. 사실상 국토로 직접적인 침략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천혜의 요새다.
축복은 국경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비슷한 면적의 유럽은 역사 내내 여러 나라로 갈라져서 싸웠는데, 미국은 한 번의 내전을 빼곤 한 나라로 유지할 수 있었을까. 역시 지도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국토의 한가운데를 대평원이 차지하고, 이 평원은 미시시피강의 지류로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다. 한 무역권이자 문화권 그리고 정치 체제로 묶일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반면 유럽은 수많은 산맥으로 분절돼 여러 독립국가로 나뉘었다.
강의 방향도 눈여겨 봐야한다. 미국의 강은 마치 정부에서 마음먹고 국도를 깐 것처럼 사방으로 촘촘하게 흐른다. 반면 중국의 큰 강은 모두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한다. 남북으로 이어지지 않은 강을 잇기 위해 중국 역대 왕조들은 국력을 쏟아 부어 운하를 파야했다. 애초에 갖고 태어나는 지리적 요건이 만든 차이다.
이외에도 로키 산맥에서 쏟아져 나오는 광물과 남부와 동부에서 나오는 석유 그리고 중부 대평원의 농작물까지. 이렇게 불공평해도 되나 싶을 만큼 축복 받을 땅이다.
경쟁자인 중국은 어떨까. 거대한 국토를 보면 지리의 축복을 받았나 싶은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국방부터 미국과 비교할 수 없는 난이도를 자랑한다. 바다로 막힌 곳은 동남쪽 일부 뿐이고, 나머지는 지금은 러시아, 이전에는 강력한 유목 국구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됐다.
지리적으로 한숨을 돌린 건 티베트와 신장를 차지한 덕분이다.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티베트를 점령해 강대국인 인도를 향해 확실한 방벽을 세웠다. 신장을 통해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세력을 통제한다. 하지만 두 지역은 중국에 호의적이지 않다. 지리적으로 너무 분절돼 있고, 민족 구성도 다르기 때문이다.
고대 시대에는 든든한 방벽이었던 남쪽과 동쪽 바다도 이제는 위험하다. 미국 등 해양 세력은 탁트인 중국의 주변 바다로 진입할 수 있다. 중국은 왕성한 먹성으로 주변 민족을 정복한 끝에 어느정도 방벽을 세웠지만, 언제든 이 벽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러시아는 불리한 정도를 넘어 ‘지리의 저주’를 받았다고 할 만하다.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사계절 내내 얼지 않는 부동항이 없다는 것. 또 다른 문제는 강대국인 프랑스부터 독일, 폴란드에서 모스크바까지 이어지는 대평원이다. 자국의 수도까지 적국의 진격을 막을 산맥 하나 없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저자는 러시아의 팽창주의적인 정책이 이런 불안감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수도를 지켜줄 산맥이 없으니 대안으로 국경을 최대한 멀리서 긋는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폴란드, 우크라이나, 조지아 등 여러 나라를 침공했다. 구 소련 시절 넓은 완충지대를 만들고 한숨을 돌렸지만, 이제는 무너졌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는 큰 비용을 감수하고서라도 갖고 싶은 완충지대인 셈이다.
책은 미국, 중국 등 강대국 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인도, 중동 심지어 북극까지 전세계를 다룬다. 한국도 일본과 함께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 독자가 가장 흥미를 가질 한국의 지리는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직접 읽어보길 권한다.
사람들은 ‘팔자’를 궁금해하면서도 불편하게 여긴다. 팔자에 대해 인정하면, 불공평하게 태어난 삶을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리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결국 미국은 강대국이 될 운명이고, 두드러지는 장점이 없는 한국은 국운이 펴기 어려운 건가 싶다.
하지만 타고난 조건을 파악하는 건 굴복하는 게 아니다. 이겨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 단계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박복하게 태어났지만, 뛰어난 인력과 기술로 극복했다. 강대국 사이에 낀 지정학적 한계를 오히려 지렛대로 삼아 가장 큰 시장에 물건을 내다파는 무역국가를 이뤄냈다.
<지리의 힘>은 세계를 상대해 경쟁하고 또 협력해야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가이드 북이다. 누군가와 경쟁을 하려면,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지금 상황은 어떤지 이해하는 건 필수다. 모두의 호구조사를 해놓은 책이 있다면 읽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