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를 맞아 비싼 달러 꼬박꼬박 내기만 하고 덮어뒀던 외신을 쭉 읽었다. FT, FP, NYT를 쭉 보며 눈이 가는 건 단연 핵 문제다. 한반도에 살고 있으니. 연초 윤 대통령의 핵 발언을 전한 기사에서 시작해 전문가 기고로 이어지며 디벨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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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a First, South Korea Declares Nuclear Weapons a Policy Option (NYT, 2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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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orea’s Flirtation With Nuclear Arms Piles Pressure on US (Bloomberg, 2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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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s evolving nuclear threat: too great to deter? (FT, 23.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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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hington Might Let South Korea Have the Bomb (FP, 23.01.18)
관심과 논조가 모두 다른 주요 매체에 이 문제가 등장한 게 눈에 띈다. 발언 전달(NYT)→미국 반응(Bloomberg)→한국 핵무장 가능성(FP)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예전에는 한국서 핵무장 얘기가 나오면 간헐적으로 기사가 나오고 금세 진압됐다. '못할 얘기'가 튀어나와 서둘러 집어넣듯. 지금은 오히려 외신에서 뜨겁다. 이 문제는 확실히 금기의 영역 바깥으로 나왔다.'한국 내 핵배치 검토'에 대한 검토를 주장하는 CSIS 보고서도 나왔다. 검토에 대한 검토라는 소극적인 얘기지만, 미국의 핵 억지력을 의심하는 걸 삼가야 한다(빅터 차 CSIS 한국 석좌)던 얘기보단 한 발 나아갔다. 이런 흐름은 지난해부터 이어졌다. 작년 10월엔 WP에 핵무장을 지지하는 전문가 기고가 실렸다. VOA에서도 전직 관료의 말을 빌려 핵무장 용인의 필요성을 얘기하기도 했다.
중국의 굴기와 북한의 핵능력 강화로 한미 동맹이 약화하고 있다 (중략) 한국의 핵무장 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대책이다 (중략) 북한의 핵무기에 위협받는 상황이 NPT가 규정하는 '비상 사태'에 해당되기 때문에 탈퇴는 정당화 될 수 있다 (WP, 제니퍼 린드 다트머스대 교수 기고문)
연말 7차 핵실험이 기정사실로 여겨지던 작년 말 분위기고 연두 대통령 발언으로 다시 불이 붙은 흐름이다. 물론 이런 전문가들의 입장이 주류는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정세가 이 주류의 논법으로 되는 일이 없다는 점이다. 작년은 수많은 현상 변경과 큰 사건이 잇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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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국이며 핵무기 선제사용의 법적 근거를 만들고, 이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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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핵보유국인 러시아가 NPT 체제 이후 처음으로 핵 공격 의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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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협정에 기반한 방위 약속이 핵보유국 앞에서 휴짓조각이 됐다.
최근 공개된 CSIS의 대만 침공 워게임 시나리오의 대전제는 '중국 본토를 공격하지 않는다'이다. 핵보유국에 대한 확전을 피하기 위해 설정한 전제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중국의 공격은 거의 어떤 시나리오에서도 상수로 가정된다. 미국이 중국을 타격하는 일은 가정도 하지 않지만, 일본이 타격 받는 건 상수다. 이게 지금 미국의 합리적 시각이다.한국의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1.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실)
2.
핵탄두가 100여기에 이르는 북한의 핵을 전쟁시 모두 격추하는 건 불가능하다(사실)
3.
미국이 자국에 대한 응징을 감수하고 핵 보복할 것이다(믿음의 영역)
북한은 명시적으로 핵 선제 공격 가능성을 명문화 하고, 실질적으로 핵보유국이 된 상태에서 '현 상태'로는 한국은 아무일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북한이 7차 핵실험을 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다. 주권국가로서 우리에 대한 공격 의사를 공식화한 국가에 대해 아무런 대응 수단이 없는 게 현재 규칙하의 현실이다.그래서 한국에선 핵무장을 얘기할 수 밖에 없다. 아니면 핵 공유나 핵 보복 시나리오의 정립을 위한 핵 연습을 얘기하는 것 외엔 주권 국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런 사정을 알기에 외신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한국 핵무장론'이 시민권을 얻었다. 현실이 바뀌고 규칙이 흔들리니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게 지금의 상황이다.핵무장-핵연습 발언에 대한 윤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반응 상당수를 보며 생각나는 건 '냉소와 이죽거림' 이다. 미국이 그걸 허락해주겠는가, 사전조율 않고 한 무책임한 발언이다,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위험한 얘기 등등.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 '협상을 통한 북한 비핵화'를 하자는 얘기를 또 하려는걸까? 혹은 설마 같은 민족을 핵으로 때리겠냐거나 북한이 그렇게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겠냐는 '괜찮을거야' 하는 얘기 밖엔 없다. 미국이 핵을 맞고도 우릴 보호할거라는 신앙에 가까운 '한미동맹 숭상론'이 여기서 나오는 것도 생경하다.한국의 핵무장은 비정상적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상황과 세계 정세는 더 비정상적이다. 또한 전략적으로도 지금은 우리도 판을 흔들어야 최소한 진전된 안전 보장을 요구할 여지가 있다.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 외엔 뭐가 있나. 나라밖에선 윗동네에 북한을 모시고 사는 우리의 활로를 찾는 얘기가 나오는데, 한국은 아직도 '윤석열'의 무식함과 아름다웠던 옛 국제정세에 머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