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낸시 펠로시 당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에 열불이 난 중국이 대만에 수출 금지 조치한 물건이 있다. 화가 잔뜩 나서 대만섬을 가로지르는 미사일까지 쐈으니 얼마나 중요한 물건을 금수 조치했나 봤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모래’다. 한쪽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모래라니.
언뜻 황당해 보이는 ‘모래 금수조치’는 의외로 여러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농담 같은 사례는 사우디아라비아가 2003년에 모래를 수출 금지한 일이다. 그 이유도 자국 내에서 쓸 모래가 없어서였다. 국토의 95%가 사막인 나라에서 말이다. 알래스카에 눈이 모자라고, 아마존에 물이 부족하다는 얘기 아닌가.
모래에도 급이 있고 생각보다 귀한 존재다. 발에 치이고 산에 널려 있는 그저 그런 흙이 아니다. 가장 많은 수요가 있는 건설용 모래만 해도 강바닥에서 긁어서 가져와야 한다. 혹은 바다에서 푼 후 소금기를 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우디의 사막에 지천으로 깔린 모래는 자격 미달이다. 너무 오랜 세월 서로 부딪히며 깎여 나간 탓에 지나치게 마모됐다. 둥근 구슬 같고 고운 이 모래는 단단히 쌓이지 않는다. 건설용 모래로 실격이다.
<모래가 만든 세계>는 이 모래를 둘러싼 산업계와 복마전을 다룬 책이다. 요즘은 뭐든 ‘세계를 바꿨다’는 책이 많은 세상이니 서가에 꽂아 놓고도 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한 광물회사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금광 하나와 모래(규사) 광산을 갖고 있다는 이 회장님은 '둘 중에 어디가 귀할거 같아요?'라고 물었다. “모래 광산이에요. 여기만 제대로 개발하면 삼성전자도 나한테 아쉬운 소리해야 해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이 자신감의 근원은 IT 산업에서 모래가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다. 모래 이야기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모래와 반도체의 관계다. 우리가 쓰는 거의 모든 IT 제품에는 반도체가 들어간다. 이 반도체의 원료는 초고순도 석영이고 이 석영을 뽑아내는 근원이 바로 모래다. ‘실리콘밸리’의 실리콘이 바로 모래에서 출발한다.
반도체를 만드는데 쓰는 모래는 그 출신부터 특별하다. 애초에 석영 비율이 99.9%가 넘는 고순도 모래를 선별해 최첨단 가공을 거친 후에야 반도체로 만들 수 있다. 99%도 부족해 99.9999..%의 순도로 만든다. 이렇게 초고순도로 가공하는 게 가능한 모래는 나는 곳도 많지 않고, 그 값어치도 상상을 초월한다.
그 정점에 '도가니'가 있다. 모래에서 뽑은 실리콘을 일단 솥에 넣고 끓여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도가니가 중요하다. 엄청난 열을 견디는 건 기본이고 실리콘에 티끌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순수한 도가니가 필요하다. 그 원료가 바로 초고순도 석영이다.
이 귀하신 몸이 나는 곳이 또 미국에 있다고 한다. 책은 스프루스 파인이라는 미국 작은 동네에서 전세계에 유통되는 이 도가니용 초고순도 석영을 거의 독점 판매한다고 말한다. 대체 이 나라에는 없는 게 뭘까 하는 허탈함이 생기는 대목이다.
방구석에서 컴퓨터로 온라인 게임을 하든, 헤드셋을 끼고 가상현실로 떠나들 간에 우리는 여전히 모래로 쌓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런 정보를 쌓아둔 곳이 데이터센터. 이 데이터센터를 가득 메운 서버와 그 안에든 반도체는 결국 모래로 만들어졌다. 인류는 여전히 모래(콘크리트)로 지은 집에 살고, 모래로 지은 디지털을 누리는 존재다.
세상만사를 통달한 듯한 챗GPT 같은 초거대AI도 모래로 지은 집이 필요하다. 훨씬 규모도 크고, 전기도 잘 들어오는 아파트인 데이터센터에 산다는 차이만 있다. 우리는 그저 모니터(여기에도 모래가 들어간다)를 볼 뿐이지만, 그 뒷단에는 이런 큰 모래로 만든 집에 사는 AI가 있는 셈.
인류의 먹성은 이 모래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급격한 도시화로 매년 수억톤의 모래가 강바닥에서 사라지고 있고 고순도 모래도 값이 널뛰고 있다. 이를 노리고 동남아시아나 인도 같은 곳에선 지역 관리와 짠 카르텔까지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물은 자원이다’라는 슬로건이 이제 익숙해졌는데, 앞으로는 ‘모래가 자원이다’라는 구호가 눈에 익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