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의 쾌거라고 난리 난 머드맥스 영상은 한 편으론 콘텐츠 만들어 먹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지 보여 준다. 이 영상의 원전은 한 유튜버가 갯벌 뉴스 영상에 영화 매드맥스를 가미해 만든 콘텐츠다. 유튜버도 KBS 영상에 영화를 가져다 가공했으니 저작권을 주장할 순 없다.
'범내려온다'로 홈런을 친 이날치가 만약 상장회사였다면, 관광공사의 '강강술래' 같은 영상이 공개 됐을 때 주가가 올랐을까, 내렸을까. '범내려온다'가 풍겼던 신선함은 겨우 1년여 사이에 더 세련된 모습으로 다른 회사 손으로 만든 콘텐츠에 등장했다. 그저 즐겁게 보는 우리와 짧은 기간에 독보적 아우라를 잃은 창작자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자본없는 자본주의>는 갈수록 좋은 게 흔해지는 사회에서 왜 사는 게 더 팍팍해지는가를 설명한다. 수십억짜리 빌라에 사는 가수를 여럿 알면서도 여전히 '연예인 하면 먹고 살기 힘들어'라고 한다. 그 업계에 얼마의 돈이 돌든 0.01%의 슈퍼스타가 독식해서다. 그런데 평범하게 살던 90%의 사람들도 점점 그 슈퍼스타 경제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이 책이 '사라졌다'고 하는 자본은 유형자본이다. 공장이나 건물, 기계 같은거다. 삼성전자나 포스코, 이마트 재무제표를 보면 자산의 30~40%가 유형자산이다. 전통적으로는 이게 상식이지만, 카카오는 이 비율이 3%다. GAFA(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는 더 적다.
무형자산은 소프트웨어나 IP, 노하우 등이다. UN이 국민회계규정에 소프트웨어를 자산으로 넣은 게 90년대다. 자본주의 역사로 보면 '신생아'인데, 선진국에선 이미 유형자산보다 비중이 크다. GAFA 4개 기업이 일본 시총을 뛰어넘은 게 정신나간 버블이란 사람도 있지만, 무형자산의 특징을 알면 이 추세가 쉽게 꺾이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무형자산의 특징은 4가지다. '4S'로 요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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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성(Scala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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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필오버(Spillo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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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너지(Synerg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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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몰성(Sunkenness)
확장성과 시너지는 쉽게 머리에 그려진다. 백종원 씨가 볶음밥 레시피를 개발하면 이는 곧바로 전국 체인점에서 활용할 수 있다. 레시피는 닳지도 않고 돈도 안든다. 고상하게 말하면 '경합성'이 없다. 또 다른 무형자산인 구독자 200만의 백종원 채널과 만나면 수백만 자취생에 퍼진다. 시너지 효과다.
그러면 이렇게 좋은 걸 나누기 쉬운 사회인데, 왜 살기가 힘들까. 이 책에서 주의깊게 다루는 문제가 선진국의 투자 저하와 경기 침체다. 물론 인구 고령화를 유력한 용의자로 언급하지만, 기업 이익의 지속적인 성장과 상위 기업의 약진을 근거로 저자는 다른 범인을 찾는다. 바로 무형자산의 스필오버다.
스필오버는 라디오 시대에 전파가 국경을 넘는 걸 뜻했다. 비즈니스로 오면서 '베끼기'란 의미로 넓어졌다. 앞서 언급한 '범내려온다'의 딜레마다. 관광공사의 새 영상을 보면 기시감이 들지만 분명 표절은 아니다. 좋게 말하면 보고 배운 것이고, 나쁘게는 베꼈다고 할 스필오버의 한 사례다.
요즘 내 홈페이지에 쓴 글에는 썸네일을 붙인다. 평생 포토샵 한 번 켜보지 않았지만, 웹에 있는 편집 프로그램과 유명 유튜버 썸네일을 곁눈질로 1시간 정도 배웠더니 이제 하나에 5분이면 만든다. 적어도 유명 유튜버와 나 사이에 '썸네일 기술'은 스필오버로 사라진 셈이다.
물론 엿보는 건 공평하다. 나도 네이버를 베낄 수 있다. 하지만 네이버가 내 아이디어를 베끼는 게 가능하면 누가 손해인가. 선두기업은 베껴 가서 자신의 무형자산에 얹어서 확장성과 시너지를 동시에 기대할 수 있다. 후발주자는 투자를 포기한다. 저자는 무형자산 시대의 고질병인 투자 부진의 한 이유를 여기서 찾는다.
매몰성도 후발주자를 주저하게 한다. 오늘부터 사진 공부를 한다 치자. 카메라 사는 건 큰 마음 먹을 필요가 없다. 당근마켓에서 사서 몇 번 쓰다 아니다 싶으면 되팔면 된다. 사진 강의는 다르다. 중고로 팔거나 환불도 못한다. 무형자산 투자는 투자한 돈을 회수하기 어렵다. 수백억원을 광고에 태웠지만 망한 브랜드의 가치는 0원이다. 이런 불확실성은 후발주자를 주눅들게 한다.
결국 선두주자는 확장성과 시너지의 순풍을 타고 약진하고 그 바깥은 투자를 주저한다. 꿈을 먹고 자라다 터진 2000년과 인터넷 기업과 지금 플랫폼 기업의 환경은 다르다.
'엿보기의 시대'에는 투자도 골치 아프다. 재무제표는 평등했다. 나도 워런 버핏도 똑같은 걸 봤다. 무형자산의 시대엔 그걸 꿰뚫어 보는 사람만 안다. 책에 따르면 90년대 전까진 탑티어 펀드매니저는 자주 교체됐다. 하지만 무형자산을 다루는 벤처투자자의 티어는 공고하다. 베일리 기포드 같은 기술을 보는 눈을 가진 현인의 시대다.
다행인 건 장삼이사에게도 해법은 있다. 엿보기가 문제라면 서로 엿볼 수 있는 모든 기업을 다 사면 된다. 인덱스 펀드다. 아니면 좀 더 직접적인 훔쳐보기가 가능한 산업군별로 사는 대안도 있다. 허무한 결론 같지만 틀린 얘기는 아니다.
1등 도시 집값이 무섭게 오르는 건 세계적 현상이다. 스필오버의 시대엔 옆집에 사는 창의력 넘치는 힙스터와 길 건너 있는 세련된 카페가 인프라다. 예전엔 큰 공장이 도시의 부를 유지했지만, 이젠 도시의 브레인이 더 가치있다. 스필오버가 집값에도 반영된다.
무형자산의 부상은 점진적으로 일어났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잠식했다. 정부도 아직 유형자산 시대의 눈으로 규제를 만들고 있어 허둥거린다. 재산권에서 저작권, 담보대출에서 투자의 시대로 흘러간다. 모두가 원하지도 않던 '슈퍼스타 경제'로 던져진 시대, 참 골치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