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전문지인 '포린폴리시' 기사에 홍수전과 틱톡 스타가 함께 배치된 기묘한 톱사진이 실렸다. 제목은 '미국의 능력주의 붕괴가 반란의 레시피다'. 능력주의를 까내려야 지성계 힙스터 노릇할 수 있는 시대를 거스르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소환한 게 19세기판 고시낭인 홍수전과 팔로워 8000만명의 에디슨 래다.
래는 맥그리거와 포이리에가 맞붙은 UFC 경기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로 치면 공중파 공채 아나운서가 하던 경기 전 리포팅을 틱톡 스타가 맡은 셈. 여기까지면 셀럽이니 그럴수도 있지,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코멘트였다. ‘이 순간을 위해 석 달이나 방송 저널리즘에 대해 공부했어!’
한국이었으면 어땠을지 상상이 간다. 하지만 미국은 쿨한 나라잖아, 학벌 같은거 집착 안하는 나라잖아? 했는데 반응은 한국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저널리즘 대학에서 수천달러를 썼고, 75개가 넘는 자소서를 썼는데 다 떨어졌다는 멘션이 올라왔다. 이 트윗은 10만개가 넘는 좋아요를 받았다. 래가 확실히 뭔가 불을 지른 것.
미국에도 고학력 백수가 많고, 불만이 쌓인 건 매한가지. 기사에서 다음에 가져오는 인물이 재밌는데, 청나라 말기 고시낭인 홍수전이다. 지방시험은 붙었는데, 성시험에선 계속 낙방했다. 우리로 치면 1차 붙고 2차는 번번이 떨어진 상황. 3수 시절에 홍수전은 정신을 놓아 버린다(..) 5수때는 본인이 예수의 동생이라 주장하기 시작함.
5수생이 요즘 같으면 트위치를 하거나 트위터에서 싸움질이나 했을텐데 당시엔 그런게 없으니 정신을 놓아 버렸다. 이때도 과거제가 있긴 했지만, 온갖 낙하산에 정실 인사로 유명무실해진 시점이다. 그런 상황에도 5수를 도전할 만큼 과거제에 대한 열망은 남아있었다. 거대한 착각이고, 썩어 들어간 시점에도 그 사회를 지탱하는 기능은 해온 셈이다.
지금의 언어로 번역하면 ‘균형 선발 전형’ 아니면 ‘민주적 통제 인사’(=엽관제)인 관료 꽂아넣기는 팔로워 8000만명이 넘는 틱톡스타와는 다른 케이스다. 하지만 시험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효과는 같다. ‘다양성’은 필요하지만 어느 경계를 넘으면 작은 오솔길인지, 뒷문인지 구분이 안된다. 많은 이들이 접근 가능한 대로가 무너지는 시기가 오면 샛길은 반칙이 된다.
시험 제도가 탄생한 건 각각 ‘왕족·외척’과 ‘호족’으로 대표되는 중앙, 지방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혈연이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유지되는 권력 사이에서 새로운 선발된 집단이 균형을 맞췄다. 시험 제도가 무너지면 귀족주의를 견제하기 어렵다. 사회 전반에 역동성을 줄 성공 경로(normal path)도 사라진다.
능력주의 욕하는 건 쏠쏠한 일이다. 학력이 높을 수록 그 일은 더 달콤하다. 이타적으로 보이고, 지사 같고 강연 기회도 많다. 트위치 백수 같은 애들 깔아 뭉개는 시원함도 있다.
그런데 대안은? 다양성이라고 칠해놓고 관계주의로 회귀한다. 엘리트 그룹이 쌓아 놓은 사회자본을 세습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바꾼다. 내가 출입하는 서울시교육청은 공개채용이라고 써붙여 놓고 뽑아 주기로 한 사람들을 뽑았다. 그래놓고 방식을 공채로 규정한 법이 잘못됐단다.
또 생각해야 할 점은 능력주의는 왜 지독하게 살아남는가다.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담론이 나온게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100년도 넘었다. 그래도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대안이 마땅치 않고, 뿌리 깊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비슷한 모습이다.
능력주의는 부의 분배보다 사회정의에 미치는 역할이 크다. 시민들에게 납득 가능한 성공 경로를 제시하지 못하면 통치 자격이 없다. 메시지 없이 통치 이데올로기도 없다.
자기 자식들은 유리 사다리로 다 올려 보내고, 민주적 인사라고 하는 건 죄다 권력자 지인인 게 현실. 능력주의 비판하면서 정작 하위 80%를 위해 뭔가를 한 것도 없고. 그럼 20대는 이런 걸 어떻게 볼까. 이 사람들이 그냥 트위치 스트리밍이나 하고 롤 하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