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의사에게 요즘 병원에 오는 고양이는 예전보다 온순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길에서 만난 고양이도 그렇다고 한다. 국내에 고양이 모래가 들어온 게 2000년쯤이니 반려묘 문화가 자리잡은 건 20년 정도다. 그 시간 동안 한국에 사는 고양이에게 뭔가 변화가 있었다.
동네 고양이가 온순해진 건 왜일까. 먼저 떠오르는 건 사람의 손길이다. '도둑고양이'라는 시각이 바뀌며 돌보는 사람이 늘었다. 당연히 경계심 적은 고양이가 밥도 많이 얻어 먹었을 것이고, 새끼를 한 번이라도 더 낳는다.
그럼 이런 온순한 고양이가 낳는 2대 고양이의 성격은 어떨까. '점점 온순해졌다'는 정답을 떠올리면 모든 새끼가 친근함이 +1씩 높아졌다고 추측하기 쉽다. 하지만 변화는 이렇게 집단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10마리를 낳으면 고양이답게 대체로 경계심을 갖고 태어난다. 이 와중에 우연히 친근감이 살짝 높은 고양이도 등장한다.
이렇게 10마리가 길에서 살다보면 까칠한 9마리는 사람이 주는 먹이를 덜 먹는다. 반면 개냥이는 더 잘 먹고, 번식도 성공한다. 이렇게 또 한 대가 지나면 까칠한 고양이는 조금씩 일찍 죽거나 번식에 실패해 줄고, 개냥이는 10마리 중 2마리가 된다. 이렇게 대를 거쳐 개냥이의 비중이 높아진다.
큰 오해는 진화가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시각이다. 까칠한 고양이를 보고 '친근하게 굴지 않는 걸 보니 진화가 덜 됐네'라고 하는 건 틀렸다. 진화는 입사 시험을 보듯 후천적으로 변신하는 과정이 아니라 집단 내에서 개체가 선택되면서 조금씩 '구성비'가 바뀌며 일어난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그때 그때 적응해서 살아남은 그 결과가 진화인 것이다.
개냥이가 더 '진화한' 고양이라고 치자. 만약 세상이 광신적 열기로 돌아가 인간들이 고양이를 학살하면 어떨까. 개냥이는 쉽게 죽는다. 반면 10마리 중 1~2마리 남았던 경계심 높은 고양이는 도시에서 멀찍이 떨어져 대를 이어간다. 이제는 '까칠함'이 환경 적응에 성공하는 무기다.
진화란 한 개체에서 일어나는 '성장'이 아니라 집단에서 우연찮게 '적응'이 일어난 과정이라는 아이디어가 투영된 게 인덱스 펀드다. 인덱스 펀드가 강한 건 그 안에 '우월한' 종목을 골라 넣어서가 아니다. 현재 환경에 적응한 종목을 모아 놓고, 적응에 실패하면 내보내서다. 인덱스의 힘은 개별 기업의 뛰어남이 아니라 현재에 적응한 개체를 담고, 실패하면 퇴출하는 매커니즘이다.
중국식 계획경제의 단점은 명확하다. 중국은 '전략 산업'을 지도부에서 찍는다. '강점'이 뭔지를 지금 기준에서 정하고 강요한다. 그러면 집단 내에 같은 성격의 기업만 잔뜩 큰다. 그러다 환경이 뒤집어지면 몰살 당한다. 2020년에 인터넷 기업이 없었다면 비대면 경제가 무너지면서 중국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을거다.
'소득 1만 달러'는 허기 달래고 입을 옷 마련하는 일이다. 여기까진 목표를 정하고 내달릴 수 있다. 이젠 따라갈 지표도 없고 개척해야 한다. 하지만 중국공산당 중앙에서 산업을 찍은 덕에 이런저런 신산업에 도전하는 '비효율'은 사라질 것이다. 그저 전략을 만들 때의 시장 환경이 변하지 않기 만을 기도해야 한다.
수억년의 세월동안 자연이 입증한 건 개별 개체가 강한 게 생존의 핵심이 아니란 거다. 근력으로 우열이 나뉘었으면 동물원에는 인간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집단 내에서 기이한 돌연변이가 자꾸 나타나고 이렇게 위험을 분산하면서 위기를 이겨낸 역사의 끝에 우리가 있다.
그저 번식하고 늘리는 게 정답이었으면 모든 생물은 무성생식을 해야한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번식하며 유전자까지 똑같은 개체를 찍어내니까. 하지만 많은 생물은 계속 '오류'를 만들어내는 유성생식을 수만대에 걸쳐 하고 있다. 개체 사이에 다양성이 없었으면 지난해 우린 모두 멸종했을지도 모른다.
마윈은 2015년에 경제의 등장으로 계획경제의 시대가 온다고 예고했다. 계획이 실패한 건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라는 얘기다. 하지만 계획경제냐 자본주의냐는 단순히 기술이나 양적인 문제가 아니다. 수억년간 지구를 지배한 진화에 도전하는 문제다. 자연사에 맞서는 중국공산당의 무한도전은 참 흥미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