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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날짜
2022/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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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부동산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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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에서 가장 기분 좋은 때가 인천공항에 내려서 한국말이 들릴 때다. 이역만리서 그럭저럭 짧은 영어로 근근이 버티며 겪은 피로가 확 가신다. 외국말을 모국어로 필터링하는 잔노동이 사라져서다.
한국에선 대체로 식사 자리에서 육아나 골프 얘기를 하지 않으면 할 말이 없다. 둘 다 하지 않으니 생존 방편으로 투지 얘기를 자주 한다. 비록 무주택자에 인덱스만 하지만. 그런데 얘기하다 보면 완전히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을 만난다.
작년에 저녁 자리에서 양주의 한 아파트 매수를 권한 분이 있었다. 평범한 직장인인 이 분은 하락장에 마포 아파트를 매수해 평생 벌 돈을 벌었다. 이후에 아예 공인중개사 자격증까지 땄다.
그분의 논리는 이렇다. 1) GTX가 들어간 파주는 9억이다. 2) 마찬가지인 양주는 4억이다 3) 그러니 2배 이상 충분히 뛸 수 있다. 불안하면 배곶신도시도 괜찮다고 했다. 딱한 민달팽이 신세 사회초년생에게 선의로 '좋은 권유'를 한거다.
여기에 지금 수도권 주택구입부담지수가 사상 최고 수준이며, 저점에서 70%이던 서울 전세가율이 50%대 초반이고 중산층이 살만한 주택 재고(KHOI 지수)는 사상 최저라고 답했다. 분위기는 짜게 식었다. 누가 맞는지는 몰라도 우린 그렇지 그렇지하며 맞장구 칠 사이는 아니었다.
국내에는 '한국에선' '아파트는' 경제 원리의 적용을 비켜간다는 관점이 있다. 아파트 예외주의다. 자산 세계의 중력인 금리의 작용도 비켜간다고 말한다. 법칙도 통하지 않으니 그 작동원리를 내거티브로 해설한다.
부동산 공부를 해야지 하면서도 이런 이유로 그 책 코너를 멀리했다. 그러던 차에 <부동산을 공부할 결심>을 읽었다. 정념으로 소용돌이 치는 재테크/부동산 코너에서 이렇게 넘버스로 이야기하는 명쾌한 책이 있다니.
저자가 채권을 하는 사람인 책을 읽으면 눈이 시원해진다. 정념을 빼고 숫자와 논리를 따라 얘기가 뻗어가니 거북함이 적다. 물론 전망이 항상 맞는 건 아니지만, 불필요한 피로는 주지 않는다. 뱁새 수준의 지식이지만 여하튼 말이 통하는 기분이다.
이 책의 핵심은 전세를 거주권을 쿠폰으로 지급하는 채권으로 해석한 거다. 한국 아파트를 금융 원리가 비켜가는 특수한 존재로 보게 만드는 핵심이 전세다. 이 책은 전세는 채권, 임대료는 쿠폰이나 배당으로 풀어낸다.
일단 명료한 금융의 틀에 들어가니 이야기가 명쾌해진다. 이렇게 넘버스가 확실하니 썰의 홍수에 파묻힐 일이 없다. 신혼부부는 신축을 좋아한다느니, 집주인이 나쁜 놈이니, 한국인은 월세살이는 싫어한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낄 곳이 없다.
물론 교육이나 호재 같은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이게 아파트 예외주의의 근거가 될 순 없다. 트레이더라면 온갖 스토리에 집중해야겠지만, 내집은 10년이 한 번만 잘 사면 되는 재화다.
투자 시장에서 정보의 유통을 '신호와 소음'이라고 말한다. 유튜브 시대가 되면서 소음이 범람하게 돼 내러티브에 익사할 지경이다. 이럴 때일수록 시시각각 소음에 휩쓸리기 보단 확실한 논리를 세워야한다.
저자의 논리도 좋지만, 편집이 말도 안되게 좋다. 이런 하락장에 이렇게 컬러풀하고 친절하고 좋은 흐름으로 책을 내주다니. 아끼는 사람이 부동산 공부한다고 하면 딱 이 책 한 권을 권하고 싶다. 많이 팔리면 좋겠지만, 또 나만 보고 싶은(..) 그런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