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돈이 돌고 돈다는 유명 조세피난처의 비결은 뭘까. 바로 차가 왼쪽으로 다닌다는 점이다. 조세정의네트워크가 꼽은 2021년 기준 상위 10개 조세피난처 중 6개 나라가 좌측통행을 한다. 좌측통행 국가는 전세계의 겨우 3분의 1이란 걸 고려하면 눈에 띄는 수치다. 왼손으로 기어 조작을 잘하는 게 금융 허브로 가는 비법이란 말인가.
물론 왼손과 금융 사이에 관련은 없다. 주요 조세피난처를 이어주는 고리는 '영국'이다. 그렇다. 또 영국이다. 상위 10개 조세피난처 가운데 유럽 국가 3곳(스위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을 제외한 모두가 영국의 식민지였거나 현재도 영국의 일부다.
우리는 조세피난처를 부자들의 일탈이 일어나는 한 '점'으로 이해한다. 실상은 여러 금융 허브가 이어진 네트워크가 본질이다. 이 네트워크의 큰 그림을 다룬 책이 <보물섬>이다. 이 네트워크를 타고 흐르는 돈을 추적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저자를 따라가다 보면 말그래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 나라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국제 은행권 자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대영제국 동창회의 구조는 거미줄을 닮아있다. 세계에 퍼진 조세피난처는 마치 지역 지사 같은 역할을 한다. 당당히 조세피난처 순위 1~3위를 차지한 카리브해의 섬들은 아메리카를 맡는다. 월가의 서비스로는 부족했던 미국 부자 혹은 남미의 마약 카르텔의 돈이 몰려든다.
홍콩은 중국의 자본을, 싱가포르는 화교 네트워크의 한 가운데를 차지한다. 오일 머니는 두바이가 있는 아랍에미리트로 향한다. 키프로스는 가스 냄새가 묻어있는 러시아의 돈을 빨아들인다. 이렇게 나열한 나라는 모두 영국의 옛 식민지였던 나라다.
이렇게 거미줄 바깥에 모인 돈은 안쪽으로 흘러간다. 2번째 고리에는 3개의 섬이 있다. 저지섬, 건지섬, 맨섬이다. 셋 다 한국 사람 대부분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모두 영국 주변에 있는 작은 섬이다. 독특한 건 영국 왕실령이라는 점이다. 영국왕의 소유이지만, 영국은 아니다. 영국이 국방, 외교를 관할하지만 각 섬은 자체 법률을 갖고 있다.
이 회색지대에 모인 돈은 다시 한 번 자유를 만끽한다. 작은 소도시 정도 인구가 모여사는 이 섬들에는 수없이 많은 금융사가 몰려 있다. 세계에서 모인 돈의 꼬리표를 떼는데 귀재인 전문가들이다. 미국의 조세 전문지 <택스 애널리스츠> 추산에 따르면 2007년 기준 3곳의 왕실령에 유치된 조세 회피성 자산 규모만 1조 달러에 이른다.
왕실령에서 목욕을 마친 자본은 종착점인 영국 런던의 시티(City of London)에 모인다. 시티는 단순히 런던의 한 구 혹은 중심지가 아니다. 영국 정부나 런던시가 아닌 자체 행정권을 행사하는 특별 자치 지역이다. 시장도 런던과 따로 뽑고 경찰도 자체적으로 운영한다. 영국 왕이 방문하려 해도 시티의 수장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는 곳이니 그 위세를 알만하다.
이 네트워크를 따라가다 보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가지는 네트워크가 중심인 런던에서 뻗어나가는 게 아니라 바깥에서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구조라는 점이다. 이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영국은 노쇠한 사자가 된 지금도 세계 금융의 중심으로 군림하고 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이 네트워크를 이루는 지역이 대체로 일반적인 국민 국가가 아닌 독특한 자치권이나 법률 체계를 가진 나라라는 점이다. 3개의 왕실령처럼 모호한 정치구조를 가지고 카리브해 국가처럼 영국의 입김이 센 정부를 갖고 있다. 혹은 홍콩이나 싱가포르처럼 도시국가이거나.
이 '점'을 잇는 '선'은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져 온 영국의 금융업 인프라다. 명문 가문의 재산을 수십, 수백년 째 맡아서 처리해 온 신탁회사와 회계 기술, 법률 서비스까지 탄탄히 갖춰져 있고, 오랫동안 쌓아온 인적 교류는 기계가 수월하게 돌아가는 기름 역할을 한다. 우리가 일부 국가의 '일탈'로 생각하는 조세피난처의 뒤에는 이런 실체가 있다.
이 '제국'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기들 만의 인적 네트워크와 규칙, 관행으로 돌아간다. 이 제국의 관점에선 규칙이지만, 영토에 기반한 국민 국가의 눈으로 볼 땐 반칙이다. 이 제국의 네트워크는 국민 국가의 입장에선 '구멍'(Loop hole)일 뿐이다. 더 큰 틀에서 보면 문명이 등장한 이래 이어져 온 정치 권력과 상인 권력의 경쟁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막대한 공공부채가 발생한 재작년에는 세금 부족에 시달린 주요국이 칼을 빼들었다. 전세계 어디에서나 최저 15%의 법인세는 부과하자는 약속이다. 그동안 조세피난처를 통해 법인세를 피해온 다국적 기업을 상대로 세금을 받을 만큼은 받겠다는 선언에 130여개 나라가 서명했다. ‘보물섬’을 상대로 국가들이 수를 둔 셈. 하지만 여기서도 영국은 디테일에서 실리를 챙겼다. 이 최저법인세에서 영국은 ‘금융 부문’ 만은 면제 받기로 한 것. 영국은 이번에도 국가 사업을 지켜냈다.
한국도 여러번 금융 허브가 되겠다고 외쳐왔다. 이런 선언이 나올 때마다 여의도에 얼마나 높은 빌딩을 지을지에 대한 부동산 개발 계획이 따라 나온다. 높은 빌딩도 좋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는 세계에 뻗어있는 '보물섬' 네트워크에 얼마나 문을 열어줄 준비가 돼있는지 아닐까 싶다. 자본의 놀이터를 만들어주기 위한 '특권'을 얼마나 내줄지에 대한 고민 말이다.
미국은 인터넷을 발명했다. 정보가 오가는 세계의 고속도로를 만들었고,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그 한 세대 앞서 영국은 돈이 오가는 길을 깔았고, 여전히 중심을 자처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국민 국가' 영국은 쪼그라 들었지만, 그들이 만든 '보물섬'은 대영제국의 잔상으로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