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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가 끝나갈 때

날짜
2023/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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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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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독일의 1년을 한 단어로 말하면 '수모'다. 메르켈 시절 유럽을 넘어 서방의 리더로 추앙 받던 독일은 온데 간데 없다. 미국과 더 얄미운 영국이 나서 윽박지르고 프랑스는 뒤에서 궁시렁거리고 심지어 폴란드한테도 노골적 압박을 받는 신세다.
이런 꼴을 당한 건 러시아와의 아름다운 관계라는 지나간 밤의 끝을 놓지 못한 탓이다. 달콤한 러시아산 가스가 영원할거라 믿고 '비용 없는' 꿀단지에 취한 결과다. 독일의 리더십이란 건 자력이 아닌 러시아산 가스와 미국산 공짜 국방에 기댄 허상이었다.
독일이 겪은 난리는 전후 세계화가 70년 만에 ‘무료 체험 기간’이 끝났다는 신호다. 이 체제에서 가장 큰 수혜를 누린 건 어디가서 명함도 내밀지 못하던 패전국과 받아주는 곳 하나 없는 신생국들이다. 전세계 어디든 해상 안전이 공짜로 지켜졌고 세계 최대 소비국인 미국이 문을 열었다. 열심히 만들고 팔기만 하면 성공으로 갈 길이 열렸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일어난 일은 이례적이었다. 자기들끼리 치고박느라 거덜난 이 구대륙(유럽) 사절들은 잔뜩 주눅이 든 채 새 초강대국 앞에 모였다. 하지만 미국은 시장을 열고 유럽을 재건하는 카드를 꺼냈다. 패전국인지 승전국인지 분간하기 힘든 조건이다. 이때까지 승전국은 상대의 시장과 원자재를 빼앗고 고립시켰다. 그런데 미국은 오히려 세계의 시장을 열고 재건을 도왔다.
앞으로는 지금까지 누린 것을 그대로 누리려고만 해도 비용을 내야한다. 셰일 혁명 이후 여러차례 ‘세계에 흥미를 잃은 미국’을 이야기 해온 피터 자이한이 <붕괴하는 세계와 인구학>에서 재차 강조하는 얘기다. 우리가 알던 룰이 바뀌었다. 가장 큰 변화는 ‘공짜’ 세계화가 끝나간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넘쳤던 젊은 피는 사라지고 세계가 늙어가고 있다. 또한 기후 위기로 기존의 에너지 정책도 다시 써야한다. 그는 우리가 알던 세계는 확실히 끝났다고 선언한다.
상황이 변했고 따라서 세계의 규칙도 바뀌고 있다. 이에 맞춰 ‘주식회사 미국’ 그룹의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돌아보니 본사 직원들은 아우성이고 자회사 지원에 허리가 휘는데다, 심지어 본사를 이겨먹겠다고 하는거 아닌가. '아무도 적이 없는 세상'의 대차대조표가 신통치 않다는 게 미국의 불만이다.
몇몇 계열사는 쫓겨나거나 알아서 살 길을 찾아 가고 있다. 석유를 납품하던 사우디라는 자회사가 대표적이다. 여기는 자영업 할 자신있으니 터덜터덜 걸어 나가고 있다. 남은 회사는 고민이다. 그룹에 남아야하나, 남아야 한다면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나.
일단 남으려하면 이제 공짜는 없다. 호주처럼 자원 기지가 되든지, 폴란드처럼 최전선 보루가 되든지, 일본처럼 바다를 나눠 지키든지. 호주는 왜 수십억 달러를 들여 핵잠을 사려하나. 뉴질랜드는 왜 비핵 원칙 포기를 고민할까. 스웨덴은 왜 중립을 포기했을까. 이제는 본사에 보낼 수표에 얼마를 써서 낼지 정하고 역할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시간이다.
독일의 난처한 모습에서 보듯 지금 정세는 좋은 시절의 추억에 잠겨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고 믿던 때와 다르다. 자리를 비우고 한가하게 담배 한 대 피러 나가던 느슨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다들 무언가 하느라 분주하다. 한국은 이제 대리도 아니고 임원이다. 나가서 치킨집을 차릴지 책임질 신사업 구상을 내놓을지 정해야한다. 더이상 사원처럼 숨어선 자리를 지키기 어렵다.
페르시아만에서 울산까지 원유가 무사히 오고, 우리 반도체가 공평한 관세를 치르고 팔리는 '상식'은 유효 기간이 다해간다. 부정해봐야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졸업식을 치르고도 교복을 입고 다니는 꼴이다. 이란과 사우디가 포옹을 하는 현실에서 무슨 일이든 일어나지 않을 게 없다. 몇년 전까지 피터 자이한의 주장은 ‘이단아’의 주장일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그의 이야기에 무게를 싣고 있다.
그는 여러차례 한국의 약점을 꼽았다. 가장 많은 수혜를 누린 세계화는 저물어 가고, 고령화는 세계 최고 속도다. 그럼에도 우리는 적응에 애를 먹고 있다. 한국은 근대화 시점에 역사의 허리가 끊겼다. 그 바람에 정부 수립 이후의 역사가 '특수'가 아닌 당연한 세계라 생각한다. 이 ‘독특한’ 세월이 끝나간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적과 타협을 권하는 자가 배신자'인 세계에서 경제와 안보의 과실을 미국과 중국에서 동시에 누리는 게 점차 힘들어진다. 탈탄소 시대에 화력발전소가 ‘좌초 자산’이 된 것처럼, 기존의 문법으로 구성해온 대외 관계도 냉정하게 가치평가를 해야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가 변한 게 아니라 세계가 변했다. 달콤했던 시대의 화양연화가 끝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