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Duplicate

호모 퍼피

날짜
2021/12/22
링크
태그
진화
3 more properties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영원한 떡밥이다. 대중적으로는 대략 결론이 난 듯하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악하다'며 조소해야 성숙한 사람으로 봐준다. 조난된 소년들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파리대왕>은 노벨상을 받았지만, 해피엔딩을 그린 <십오 소년 표류기>는 잊혀졌다.
이 책은 인간은 선하다며 반기를 든다. 일단 선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머릿속에 착한 사람은 떠올라도 이들을 꿰뚫는 키워드를 뽑긴 어렵다. 내 마음대로 친절, 용서, 구호 같은 협력은 선한거고 폭력 같은 경쟁은 악하다고 규정해본다.
'인간은 악하다'가 정설처럼 받아들여진 건 다윈의 진화론이 잘못 읽힌 탓이 크다고 본다. 진화를 다른 개체를 밟고 올라서서 우월해지는 과정으로 보는 시각이 아직도 많기 때문. 실상은 그럭저럭 때 맞춰서 목숨 연명하고 후손 남기기에 성공한 형질이 살아남은 게 우리일 뿐이다. 여기에 강하고 약한건 없다.
우리 몸 곳곳에는 살아남은 비결이 남아있다. 대표적인 게 흰자가 넓은 눈. 의외로 인간 외에 다른 동물은 흰자 비율이 적거나 없다. 지금 구글에 '소 눈' '말 눈' '원숭이 눈'을 찾아보면 눈동자 거의 전체가 검다. 내 고양이 눈을 방금 봐도 흰자가 거의 없다.
별다른 기능도 없는 흰자가 이렇게 큰 이유는 뭘까. '눈을 보고 말해요'라는 말처럼 의사소통에서 눈은 절대적이다. 속된 말로 '눈알 굴린다'는 얘기는 못 믿겠다는 의미. 흰자가 넓을수록 그 사람의 시선 방향은 잘 읽히고 감정 소통도 원활하다. 사회생활에 유리한 성질이다.
뇌피셜 같지만 이런 해석은 진화생물학 연구의 결과물이다. 애초에 근력으로는 살아남지 못할 인류는 무리에 잘 적응해야 자손을 남길 수 있었고, 소통수단인 눈을 활용 못하는 개체는 죽거나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 2021년을 사는 70억 인류는 대체로 큰 눈망울 덕에 친구를 사귄 선조의 후손인 셈이다.
점차 선한(=협력적인) 개체가 살아남게 된 건 개의 여정과도 겹친다. 개가 인류와 동행한 데 대한 유력한 가설은 무리에서 밀려난 늑대가 먹을 게 많은 인간 군락에 기웃거렸고, 이를 호신용으로 거두면서 공생 했다고 한다. 공격성이 강한 늑대는 살해됐고, 유순한 종만 대를 거쳐 거둬지면서 오늘의 개가 됐다.
의외로 인간도 강아지처럼 귀엽고(..) 상냥해서 살아남은 건 마찬가지다. 이 책에선 인간을 그래서 '호모 퍼피(puppy)'라고 부른다.
이 결론은 직관에 반한다. 지식채널e를 통해 국민 교양이 된 스탠퍼드 감옥 실험, 스펀지(..)를 통해 방관자 효과를 알린 키티 제노비스 사건은 '협력하는 인간'을 회의하게 한다. 하지만 두 사례는 모두 조작된 얘기다. 전자는 오염된 실험이었고 후자는 경찰 신고가 2건이나 이뤄졌다. 인간성 혐오가 가득한 전후 분위기에 부응한 이야기였을 뿐이다.
물론 더 가까운 반례도 많다. 천수를 누리고 죽은 전두환이나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인물이 조직에서 잘나가는 걸 보면 그렇다. 하지만 선한(=협력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 개체가 아니라 인류 집단이 그렇다는 얘기. 많은 범죄자가 있지만, 대체로 인간이란 종은 더 선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다.
비정해보이는 '적자생존'을 연구한 많은 책은 인간의 사회성을 강조하며 끝맺는다. 영화는 비극을 그려야 흥행하고 뉴스는 최악의 인간을 써야 읽힌다. 그렇지만 이건 예외적이고 나쁜 소식에 끌리는 인간 본성 탓일 뿐. 대체로 인간들은 더 친절하고 협력하는 사람에게 끌린다.
살아남으려고 협력하는 게 어떻게 '본성'이냐고 반론할 수 있다. 과연 백지장 같은 본성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백지상태에서 선악을 가를 수 있다는 생각에 회의적이다. 우주에서 동서남북을 가르는 게 불가능한것처럼. 현재 주어진 상황을 반영하고 얘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어느 때보다 나쁜 뉴스에 지쳐있는 시기에 읽어볼만한 책. 스티븐 핑커의 1400페이지 짜리 <인간 본성의 선한 천사> 완독에 도전하려다 포기한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이상 점심시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