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fact)에 대한 환상이 있다. 온라인에서 말싸움을 주고 받을 때 ‘이건 팩트’라고 하면 더이상의 반론을 거부한다는 선언이다. 나라의 문제를 토론하라고 만들어 놓은 국회에서도 비슷하다. 그만큼 오늘날 ‘팩트’의 드높다. 고대 사회의 ‘신의 명령’에 준하는 권위를 갖췄다.
팩트가 압도적 권위를 가지게 된 이유는 ‘팩트는 가공되거나 왜곡될 수 없는 사실 그 자체’라는 믿음이다. 팩트는 마치 자연 현상 같이 어떠한 의도, 특히 악의적 왜곡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아무리 덥다고 느끼더라도 오늘 날씨는 선선한 18도다. 이건 팩트다’ 이렇게 말하면 반론의 여지가 사라진다.
<팩트풀니스>는 이렇게 묵직한 팩트라는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는 ‘팩트 폭격’으로 가득한 책이다. 닥치는대로 부수는 대상은 우리 인류가 하고 있다는, 무려 10가지나 되는 ‘오해’다. 세계는 망해가고 있고, 인류는 곧 몰락할거라는 걱정은 순진한 오해일 뿐이라며 몽둥이를 휘두른다.
저자인 한스 로슬링은 의사이자 통계학 석학이다. 이런 배경에 어울리게 강렬한 도표로 그려낸 팩트로 오해를 부순다. 대표적인 오해는 ‘부정 본능’이다. 사람들이 세상을 나쁘게 그리고 나빠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말한다. 일관되게 줄어드는 나쁜 것 16가지(항공기 사망, 아동 노동, 오존층 파괴 등)와 늘어나는 16가지(자연보호구역 면적, 암 생존율, 전기 보급률 등)를 담은 도표를 4페이지 가득 채우며 반박한다.
이렇게 오해를 분쇄하며 책의 제목인 ‘사실충실성’(Factfulness)을 강조하는 건, 세계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진짜 현실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인간의 편향성을 이용해 마치 세상이 망할 것 같이 보도하는 뉴스와 종말론적 운동가 등에 호도되면 안된다는 외침이다. 이 주장을 수백 페이지 분량의 팩트로 뒷받침하고 있으니 감히 반론을 꺼낼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팩트는 진리도, 자연 현상 같은 가치중립적 존재도 아니다. 팩트는 달아오른 철처럼 얼마든지 가공할 수 있다. 물론 저자가 보여준 숫자, 데이터는 모두 사실이다. 하지만 팩트와 데이터는 다르다. 팩트는 여러 데이터를 조합해서 도출한 결과물이다. 이 과정에서 ‘의도’가 끼어들 틈이 생긴다. 즉 팩트는 어떤 데이터를 보여주고, 또 숨길지 정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가공품인 셈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1900년 0.03%에 그쳤던 지표면에서 자연보호구역이 차지하는 비율이 2016년엔 14.7%로 올랐다고 말한다. 천연두는 1850년에 발생국가가 148곳에 달했지만, 1979년엔 소멸했다고 강조한다. 두 데이터를 조합하면 독자는 ‘인류는 더욱 자연을 잘 보호하고 있고, 전염병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는 걸 ‘팩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저자가 보여주지 않은 데이터를 보면 판단이 달라진다. 약 1만년 전 전체 생물량(생물체의 질량의 합) 중 1% 미만을 차지하던 인간과 그에 딸린 가축은 지금은 전체의 99%에 육박한다. 지구의 종 다양성은 자연사의 관점에서 볼 때 유례없이 빠르게 소멸하고 있고, 행성을 호모 사피엔스라는 1종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의미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전염병 정복’이 얼마나 허무한 착각인지 보여줬다.
<팩트풀니스>에 없는 나빠지고 있는 데이터는 수없이 많다.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에서 백인 중년 남성의 평균 수명이 줄어들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알코올과 약물 중독 그리고 자살이다. 대량 총기 난사도 늘고 있다. 세계적으로 권위주의 국가는 증가하고 있다. 세계 주요국의 부채는 경제를 짓누를 만큼 쌓이고 있다. 세계가 겪어보지 못한 고령화가 본격화하고 있다.
저자가 강변하는 낙관주의와 명징한 데이터를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다 책을 닫을 때는 묻는다. “그래서 어쩌라고?”
인류는 왜 세상을 이렇게나 세상을 나쁘게 보는 ‘오해’를 수만년째 하고 있을까. 생물학자들은 긍정적 신호보다 당장 목숨에 위협이 되는 부정적 신호에 반응하는 게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반가운 사람이 찾아오는 건 기쁜 일이지만, 수상쩍고 무섭게 생긴 사람이 들이닥치는데 훨씬 두려움을 느끼는 게 살아남는데 유리하다. 저자가 지적한 ‘오해
는 인류의 마음속에 내재된 ‘조기경보장치’다.
이런 부정 편향은 인류가 끊임없이 불평하고 비판하며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는 원동력이 됐다. 매일 수천만명의 직장인이 안전하게 출근하고 집에 돌아온다. 하지만 몇몇은 사고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럼에도 뉴스는 ‘겨우’ 몇명인 그들의 사연을 보도한다. 이것도 ‘편향’인가? 수천, 수백만명의 ‘팩트’를 외면한 편향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인류는 나쁜 일에 유독 주목하며 함께 분노하고 화내며 문제를 해결해왔다.
‘인류는 진보하고 있다’는 믿음의 가장 큰 지지자는 성공한 사업가들이다. 이 책이 팔리는데 가장 큰 기여를 했을 추천사의 주인공 빌 게이츠가 대표적이다.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미국의 모든 대학 졸업생이 읽을 수 있게 무료 배포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비슷한 내용의 <이성적 낙관주의자>를 추천했다.
결과적으로 이런 낙관주의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 대한 반박에 활용된다. 노동 문제, 환경 파괴, 불평등, 정치적 극단주의 등 이런저런 불평을 ‘오해’ 혹은 강박적 반응으로 치부하려는 이들에 힘을 실어준다. 물론 저자가 기득권의 논리에 부합하고자 책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의도 그리고 ‘팩트’에 무관하게 낙관주의를 이용하는 이들은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격언이 있다. 그의 지향을 떠나 사회를 더 좋게 바꾸려는 이에겐 필요한 다짐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문제’를 인식해야하고, 그 원동력은 비관이다. 그 후에 개혁을 향한 낙관으로 불타는 의지가 따라야 한다.
그래서 <팩트풀니스>가 보여주는 따뜻한 현재의 온기에 달아오른 이성에 찬 물을 끼얹어야 한다. 신문을 펼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자. 세상에는 아직 이성에 찬물을 끼얹을 문제가 얼마든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