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암호화폐 스타트업이 만든 앱에 가입한 적 있다. 알고리즘 매매로 괜찮은 수익률을 낼 수 있다는데 투자 방법이 희한했다. 국내에서 거래가 어려운 미국의 암호화폐 거래소인 바이낸스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해당 기업 명의의 계좌로 투자금을 보내라고 안내하는 게 아닌가.
만약 이 회사 계좌로 돈을 보냈는데 갑자기 회사가 문을 닫고 잠적하면? 이 회사가 운영하던 오픈채팅방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조건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 정도 리스크도 감수하지 않고 무슨 투자냐"는 힐난이 돌아왔다. 유명 유튜버인 회사 관계자가 신뢰를 담보하지 않냐는 이들이 연달아 나타났다. 조용히 그 채팅방을 떠나고 앱을 지웠다.
개인투자자가 늘고 책이나 유튜브를 통해 많은 투자 지식이 전파됐지만, 여전히 어려운 개념이 '위험(Risk)'이다. 예를들어 비트코인의 큰 변동성은 상대적으로 큰 수익률의 대가로 감당할만한 위험이다. 하지만 투자자의 돈을 회사 명의로 챙긴 ‘벌집 계좌’를 들고 회사가 도망칠 가능성은 수익률과 관련 없는 위험이다. 여전히 투자의 세계에선 이 둘을 혼용한다. 어떤 이들은 의도적으로.
•
전문가가 생각하는 리스크 = 1시간 줄선 복어집의 요리가 맛이 없을 가능성
•
일반투자자가 감수하는 리스크 = 복어 요리를 먹고 중독 돼 죽을 가능성
<리스크의 과학>은 '리스크학'을 연구하는 경제학자가 쓴 책이다. 원제는 '홍등가로 걸어간 경제학자'. 품위를 위해 출판사가 참은 것 같지만, 원제가 더 책의 메시지에 부합한다. 복잡한 수식으로나 표현되는 리스크가 뭔지 실생활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데 충실한 책이다. 이 자극적인 원제는 ‘왜 많은 성매매 여성이 높은 수수료를 떼어가는 포주와 일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저자의 연구를 의미한다.
성매매 여성은 큰 리스크를 감수한다. 지역에 따라 불법이기 때문에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고, 암시장에서 일할 경우 폭력에 노출된다. 영국의 잭더리퍼나 한국의 유영철 등 많은 연쇄살인마의 범행 대상은 성매매 여성이었다. 이런 큰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하는 게 포주가 운영하는 기업형 성매매 조직이다. 30~40%의 높은 수수료를 납부하지만, 그만한 가치의 리스크 감소를 기대할 수 있다.
이렇듯 리스크는 많은 선택의 중요한 변수다. 리스크를 알아야 전략을 세울 수 있다. 2000년대 초에 출판업계서 근무하는 직장인의 최대 위험은 인터넷 포털이었다. '인터넷 산업의 발달로 책이 덜 팔려서 회사가 망하는' 걸 위험으로 정의했으면 헤지할 방법이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네이버의 주식을 사는거다. 몸은 출판사로 출근해도 내 돈은 인터넷 산업에 투자하는 방식의 헤지다.
목표에 따라 리스크를 얼마나 감당할지도 달라진다. 커리어와 자산의 안정적인 성장을 원하는 직장인이라면 대규모 스톡옵션이나 우리사주를 갖고 있는 건 위험하다. 내 커리어와 자산을 모두 한 회사에 ‘몰빵’ 투자하는 건 안정적인 목표와 맞지 않다. 회사가 망해도 살아남을 수 있게 다른 회사에 투자하는 게 합리적이다. 반면 단기간에 인생 역전이 목표라면 회사에 올인해볼 수도 있다.
직장인은 채권일까, 주식일까? 대다수는 채권이다. 30년 정도 고정이자를 지급하고 끝나는 채권. 일반적인 직장인은 근무하는 기간동안은 리스크가 매우 낮다. 이런 직장인일수록 투자는 공격적으로 주식 비중을 높이는 게 적절하다. 일상적으로 보이는 직장 생활에도 리스크의 개념을 적용시키면 가능한 계산이다.
채권이 아닌 직장인도 있다. 영업 성과로 보상받는 영업사원은 주식과 비슷하다. 이런 일을 하면 투자도 공격적으로 하는 성향이 큰데, 재무적으로는 오히려 안정적인 채권이나 배당주에 투자하는 게 어울린다. 고정급여를 받다가 원하면 언제든 개인 사업이 가능한 전문직은 전환사채(CB) 같은 존재가 아닐까. 점차 경력 채용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더많은 직장인이 전환사채가 되어가고 있다.
투자 콘텐츠 수준이 높아져 자산배분은 개인투자자도 익숙해졌지만, 커리어까지 포함한 큰 틀의 포트폴리오 개념은 아직 생소하다.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다 성장성, 변동성이 큰 업계로 옮겨 갔으면 자산 배분은 오히려 안정적으로 조정해야 한다. 스타트업 종사자는 성향상 벤처 투자 비율이 높은데, 특별한 정보가 있는 게 아니라면 재무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선택이다.
낮은 수익률은 기분을 우울하게 하지만, 리스크에 대해 오판하면 인생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 투자에서도 삶에서도 가장 중요한 원칙은 ‘다음 게임을 할 기회를 잃지 않는 것'이다. 수익률에 대해 공부했다면, 이제는 리스크를 이해할 시간이다. <리스크의 과학>은 괜찮은 가이드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