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가 절정을 향할 때, 극장 구석에 불이 난걸 눈치챈 지휘자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극장을 빼곡히 채운 수천명의 관객은 음악에 취해 있는 상황입니다. 당장 지휘봉을 던지고 모두 나가라고 외쳐야 할까요? 그러면 극장은 불이 번지기도 전에 아수라장이 될 겁니다.
베테랑 지휘자라면 관객을 고조시킨 연주를 조금씩 잦아들게 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진정 시킨 후 퇴장을 요청할겁니다. <Firefighting>은 그 일을 해낸 능숙한 지휘자 셋이 어떻게 세계 최대의 파산 사태를 극복 했는지를 담은 책입니다. 만약 AIG가 무너졌다면? 의회가 결국 구제금융안을 부결했다면? 벌어질 수 있던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면 지구를 구했다 할 만합니다.
지난 금융위기를 모두 '2008년' 금융위기나 '리먼브라더스 사태'라고 부릅니다. 한 금융사나 특정 시점에 사건을 못박습니다. CDO, MBS, ABS, CDS, 서브프라임, 트렌치 같은 들어도 모를 얘기로 가득한 사건이다 보니 그때쯤 큰 회사가 무너져서 생긴 일로 기억하는 정도에서 그칩니다. 하지만 이 책은 시계를 90년대까지 돌려 최초 발화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중국에서 밀려 들어온 공짜 달러와 감독망에서 벗어나 있던 비은행권이 만든 버블은 '집값 불패' 신화와 맞물려 버블을 키웠습니다. 백미는 전자책만 읽는 나같은 사람도 종이책을 사게 만든 끝내주는 차트입니다. 왜 미국이 시시각각 망하는 길로 접어들고 있었는지 도표 3~4개로 정리합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활약한 벤 버냉키 연준의장, 티머시 가이트너 뉴욕연준총재, 헨리 폴슨 재무부 장관은 서브프라임 붕괴로 시장이 뒤집어질 때도 음악을 멈추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책은 그 분투기를 담고 있습니다.
연준의 권한과 의회를 닥달해 '실탄'을 채웠지만, 구제금융을 주면서 은행에 굴욕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구제금융 받은 은행'이라는 낙인이 시장에 미칠 악영향을 고민한 겁니다. 시장에 사이렌을 울려대지 않으려고 했으니까요. 갖가지 기술을 활용해 '돈을 받고도 받지 않은 상태'라는, 체면은 살리면서 돈은 주는 길을 찾았습니다.
돈을 받아도 굴욕을 겪지 않는다는 게 알려지자 번호표를 뽑고 파산을 기다리던 은행들이 찾아와 구제금융을 타갔습니다. 대서양 건너 유럽은 달랐습니다. 위기에 처한 은행을 국유화하거나 징벌적인 조건을 내걸고 돈을 줬습니다. 구제금융 창구 위에 '무료 급식소'라는 팻말을 붙인 셈이죠. 세상에서 빌어먹고 남루한 사람에게 돈을 맡기는 예금자는 없습니다. 구제금융 집행률도 떨어지고, 뱅크런은 계속됐습니다.
저자들은 일시적인 공매도를 요청했던 때를 회상하며 '절대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라고 말합니다. 시장 참여자에게 나쁜 신호를 줄까 걱정해서죠. 시장이 무너질 위기인 상황에도 음악, 즉 시장의 흐름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구제금융은 인기가 없습니다. 어느 국민도 레버리지로 투자하다 말아먹은 월가에 돈을 주고 싶지 않죠. 구제금융이 없으면 1조 달러로 막을 일에 10조 달러를 써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설득 했을까요? 구제금융을 주지만, 환상적인 조건의 우선주나 담보를 받았습니다. 실제로 구제금융은 재무부 금고에 수백억 달러의 수익을 남겼습니다. 시장의 원리를 여기서도 활용한 셈입니다.
물론 이 책은 청산과 엄벌보다 구제를 택한 3인방의 자기 변호가 녹아 있습니다. 월가에 관대했던 건 비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평소에 아이를 엄하게 키워야 해도 벼랑 끝에 있을 때 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들은 의회에 가서 읍소하고, 언론에서 욕도 먹으면서 위기를 수습했습니다. 매를 꺼낼 때가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챌 만큼 스마트했습니다.
요즘 한국 정부가 벌이는 '기습공격'이 떠오릅니다. 찬 바람 불 때쯤에야 닫던 대출 창구 셔터를 갑자기 내려버렸습니다. 계획을 세우고 이사를 준비하던 사람은 날벼락을 맞았습니다. 새로 취임한 금융 관료는 '대출자와의 전쟁'을 하러 온 분위기입니다. 이미 받은 대출도 롤오버를 해줄건지 안해줄건지 가타부타 얘기도 없습니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부러뜨리고 윽박지르니 관객은 '혹시 어디 불 났나?' 불안해집니다.
300페이지도 안되는 책에 금융위기의 시작과 진행, 수습까지 나같은 문외한도 알수있게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셋 뿐 아닐까 싶습니다. 도표만 따로 떼어 만든 부록이 50페이지가 넘습니다. 워런 버핏이 금융위기를 돌아보기 위해 필요한 단 한 권의 책이라고 했으니 말 다한거 아닐까요.
읽는 속도가 느려서 책을 고를 때 신중한 편입니다. 의외로 어느 출판사 책인지가 꽤 의미있는 지표가 됩니다. 이레미디어는 좋은 책을 많이 내는 출판사입니다. 원저부터 편집, 번역까지 깔끔합니다. 티머시 가이트너가 쓴 <스트레스 테스트>나 벤 버냉키의 <행동하는 용기>가 부담스럽다면 대신 읽어도 손색없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