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는 디플레적이고, 노인과 청소년은 인플레적이다". 학문의 대가는 명확한 전제에서 시작한 통찰로 삼라만상을 꿴다. 그러면 이 한 줄의 명제로 세계 경제의 변곡점과 다음 30년의 변화를 그릴 수 있을까. 이 어려운 일은 한 사람이 있다. 거시경제학의 대가, 찰스 굿하트다.
다시 첫 명제로 돌아가면, 노동자는 소비하는 것보다 많이 생산한다. 직관적으로도 직장을 다녀보면 이해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자본가는 노동자가 월급보다 많은 산출물을 만들 경우에만 고용한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경제에서 소비보다 많은 생산을 해 물가를 낮춘다. 청소년과 노인은 그 반대의 역할을 하기에 물가 상승을 만드는 존재다.
석학의 세계 경제 전망은 이 토대에서 시작한다. 성격 급하게 결론부터 말하면, 앞으로 세계 경제는 과거의 저금리-저물가 시대를 끝내고 고금리-고물가로 간다. ‘그거 지금 누가 모르나?’ 싶지만, 이 주장을 담은 <인구 대역전>이 출간된 게 2020년 8월. 그땐 파월도 인플레가 오지 않을거라 하던 시기다.
지난 한 세대의 저물가는 중국과 동구권발 노동력 공급 충격의 결과다. 여기에 선진 경제도 전후 베이비붐을 맞아 노동 공급이 쏟아졌다. 이젠 이 수레바퀴가 거꾸로 돈다. 지구별이 누리던 인구 보너스는 끝났다. 많은 나라에서 정년 연장을 해봤지만, 평균 은퇴 연령은 오르지 않았다. 즉 공급 곡선이 왼쪽으로 간다.
여기에 수요를 갉아먹는 문제도 있다. 이 책의 ‘엣지’는 노인 치매 문제를 진지한 거시 경제의 비용 문제로 다룬 점이다. 앞으로 고령화는 공급 감소에 그치지 않는다. 전세계적으로 치매가 ‘창궐’해 엄청난 비용을 잡아먹는다. 여기서 비용에는 노동력도 포함한다. 특히 젊은 여성 노동력이 시장에서 사라진다.
거의 냅킨에 슥슥 그려놓고 푼 썰에 가깝지만, <인구대역전>은 주장은 적고 검증으로 채운 지극히 학자가 쓴 책이다. 주장의 논증도 기초적인 거시경제학 지식이 없으면 따라가기 버겁고, 책의 후반부는 전부가 예상 반박에 재반박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급커브. 그러면 범용 AI의 등장은 어떤 미래를 만들까. 우리가 생각해야할 건 <터미네이터>나 <아이 로봇>이 아니다. 18세기의 서아프리카 노예 해안과 20세기의 주강 삼각주를 다시 떠올려야 한다. 잠깐 백미러를 보자.
현재까지 나온 범용 AI를 이렇게 저렇게 뜯어보고 생각한 BM은, 앞으로는 구글 같은 빅테크가 ‘고교생’ 같은 말귀를 알아듣고, 상식을 갖춘 존재를 찍어낸다. 그러면 또 다른 기업이 이들을 데려다가 다시 교육시킨다. 법률, 금융, 교육 등 전문 분야에 맞춰 구글서 데려온 친구를 재교육 시킨다.
실제로 지금까지 나온 생태계는 이렇게 굴러가고 있다. 범용 AI의 API를 토큰을 지급하고 데려와서, 작문이나 그림 그리기, 사진 편집 SaaS 서비스를 만들어서 재판매한다. 이 기업의 서비스를 쓰는 고객사들은 이들을 이용해 어시, 인턴 역할을 맡긴다. 월 몇 달러만 내면 된다.
리서치 센터의 RA, 로펌의 어쏘, 컨설팅펌의 인턴이 대체로 하는 일은 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모으는 일이다. 모두 범용AI가 잘할 수 있다. 여기에 버티컬AI의 튜닝도 들어간다. 시안 수십 개 뽑는 디자인 회사 어시나 장당 만 원 받는 통역가도 마찬가지. 단기적으론 이들이 범용AI의 경쟁자다.
예를 들어 속보, 가십 기사 쓰기와 기사용 도표 만들기에 최적화한 SaaS 서비스를 만들어서 월 사용료를 받고 언론사에 팔 수 있다. 현실화하면 인턴 기자나 디자이너 상당수를 줄일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의 빅테크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범용 AI를 데려다(API) 특정 기능에 적용해 강화한 버티컬 AI로 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카카오도 이 방향을 언급하고 있다. 국내 빅2라고 할 기업마저 감히 수십조가 들지도 모를 범용 AI를 만든다고 나서기 어려운 현실이다.
정리하면 앞으로는 구글이나 MS가 돈과 데이터를 퍼부어 데이터센터에서 ‘지적 노동력’을 전세계에 돈을 받고 공급하고, 각 나라에서는 이들을 데려다가 직업 교육을 시켜서 필요한 회사에 공급한다. (아직은) AI에겐 재산권도 없고, 노동력이 이쪽으로 건너오는 일이니 우리는 이제 남부의 백인이 됐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저들과 경쟁 관계인가, 아니면 주인이 될 것인가.
이런 일이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18세기 서아프리카 해안에는 발에 차꼬를 찬 노예가 줄지어 배를 타고 미대륙을 향해 갔다. 20세기의 중국 주강삼각주는 수억 명의 인구를 세계 경제에 공급했다. 둘 다 공급 충격 요인이다. 다만 범용 AI는 근육 노동이 아닌 지적 노동을 대신한다는 게 다르다.
지난 세계화 기간 동안 승자는 경제에 진입한 동아시아의 노동자들과 이들에게 기술과 자본을 제공한 선진국의 자본이었다. 패자는 새로 공급된 아시아의 저렴한 노동자에 밀려난 선진국의 육체 노동자들이었고. 범용 AI발 ‘두뇌 공급 충격’ 사태의 영향을 예상하는 데는 이 로직이 유용할 것 같다.
두려워만 할 일은 아니다. 개발자들은 '인도인이 하는 유튜브' 없이는 일을 못한다. 인도인 때문에 당장 내 일자리가 사라지기보단 지름길을 찾고 업무 역량을 높이는 방향으로 굴러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대체될 정도로 낮은 생산성을 가진 사람이면 문제지만.
모두가 패자가 될리는 없고, 오히려 지난 세대동안 경험한 공급 증가의 수혜를 앞으로도 누릴지도 모른다. 다만 나를 포함한 화이트칼라 직장인 대부분은 중국이 WTO에 가입하는 걸 바라보는 오하이오주 공장노동자와 같은 처지다. 국가적으로도 한국은 지난 세대에는 세계화의 승자였지만, 앞으로는 쉽지 않고. 긴장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