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lling the goalie'라는 전술이 있다. 아이스하키에서 골키퍼를 빼고 대신 공격수를 투입하는 걸 말한다. 만약 어떤 감독이 이런 짓을 하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거다. 그래도 하는 건 1~2분 남은 시점에 지고 있는 팀일 때다. 연구에 따르면 '풀링 더 골리' 전술을 쓰면 실점 확률은 4배로 뛰지만, 득점 가능성도 곱절이 된다.
지금 미쳤다는 소릴 듣는 지도자가 있다. 푸틴이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너무 많은 걸 잃은 걸 보면서 다들 '대체 왜?'라고 묻고 있다. 좀 더 넓게 보면 침공의 이유는 뚜렷하다. 러시아에겐 시간이 없다. 극단적으로는 말해 망해간다. 인구는 1993년, 경제는 2015년부터 역성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면 골키퍼를 빼는 승부수를 던질 때다.
피터 자이한은 맞는 말도 재수없게 한다. 그래서 싫어했는데, 이번 사태를 겪으며 그의 책을 다시 꺼냈다. 밑줄 친 문장을 다시 읽었다. '러시아가 인구 감소에서 살아남으려면 우크라이나·벨로루시·몰도바·루마니아·폴란드·발트3국·조지아·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등 11개국을 흡수하는 방법 외에는 도리가 없다'. 이 책은 2017년에 나온 책이다. 읽었던 내용을 까먹지 않았다면 얼마전 내기할 때 침공에 걸었을 것 같다.
적어도 자이한에 따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불확실성이 아니다. 일어날 일이고 끝이 아닌 시작이다. 단순히 인구가 줄어서 침공을 하는 게 아니다. 러시아의 이상적인 국경선은 소련 때 달성했다. 동쪽은 톈진 산맥과 카라쿰 사막, 중앙은 대초원이 방벽 역할을 했고, 남부는 코카서스 산맥이 보호했다. 유럽은 다뉴브강 유역과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확보해 방어해야 할 공간은 동서독이 접하는 300키로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소련이 무너지면서 나열한 모든 공간을 잃었다. 그런데도 국경선은 소련 때보다 오히려 길다. 그러면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더 가깝다. 동시에 소련 때보다 인구는 줄었고, 곤두박질 친 출산율 때문에 상황은 더 악화한다. 산업 고도화도 실패했고, 외국인 유입도 어려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마지막 힘이 남아있을 때 국경을 ‘방어 가능한' 수준으로 넓혀 놓는 것. 어렵지만 해야만 하는 미션인 셈.
친절하게도 러시아의 액션플랜도 단계별로 제시된다.
①우크라이나 침공과 유럽의 분열 유도: 2014년 이후 꾸준한 견제로 무력화한 우크라이나를 점령한다. 기껏해야 경제 제재로 맞설 유럽 국가를 분열 시킨다.
②발트3국 확보와 스칸디나비아 반도 견제: 발트 3국을 침공하는 건 러시아에겐 일도 아니다. 기갑부대로 반나절이면 수도까지 갈 수 있다. 문제는 단단히 결합한 북유럽 4국의 견제, 만만치 않지만 물량 공세로 지구전화 한다.
③폴란드 접수: 러시아의 대평원은 폴란드 동부로 가면 약 300킬로미터로 좁아진다. 결국 러시아의 생존 작전은 여기서 대미를 장식할텐데, 저자는 독일의 재무장은 필연적이며 참전도 불가피하다고 본다. 바르샤바에서 독일까진 500킬로미터 남짓이고, 사이를 가를 장애물은 없기 때문.
④코카서스 국경 확보: 가장 쉬운 미션. 이미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영향권 안에 있고,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도 버거운 약체. 여기까지 확보하면 마지막 퍼즐까지 완성.
적어도 2017년 시점에 예상한 우크라이나 침공은 현실이 됐고, 고착 상태에도 왜 계속 싸우는지 더군다나 핵 운운하는 이유는 설명이 된다. 하지만 침공을 맞춘 저자가 틀린 점이 있다. 그는 우크라이나 군은 이미 형해화 했기 때문에 키이우 점령은 일도 아니라고 봤다. 그런데 현실은 모두가 아는대로다. 푸틴은 ①부터 난관에 부딪힌 것. 그래도 멈추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뒤가 없기 때문이다.
분석을 보며 키를 쥐고 있는 나라는 두 곳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독일. 독일의 재무장과 참전(!)은 피할 수 없다는 얘긴데, 일단 재무장은 확실하다. 거의 언급되지 않는 변수는 독일이 가동 중단했던 원전이다. 후쿠시마 사고 전까지 독일 에너지의 4분의 1은 원전에서 왔다. 이후 해체에 들어간 원전은 1기 뿐. 이 말은 되돌리면 독일은 25% 추가 발전 역량을 갖췄다는 얘기다.
의외의 키맨은 터키다. 터키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튼튼한 인구 구조와 상비군을 갖췄다. 또 흑해 통제권과 코카서스에 개입할 능력이 있는 국가. 여기서 러시아가 놓은 수가 시리아다. 러시아는 일부러 시리아 반군을 격퇴해 IS의 공간을 만들었다. 난장판이 된 시리아에서 난민은 터키로 쏟아졌고, 터키는 유럽으로 내보냈다. 그 결과 유럽과 터키는 등을 돌렸다. 적을 갈라놓고 터키의 주의를 돌린 러시아는 쉽게 발칸 반도로 진격했다.
사후 결과론적 얘기지만 러시아는 오래 전쟁을 준비했다. 러시아는 엄청난 돈을 쌓아뒀다. 몇년전에 푸틴이 연금개혁을 하느라 지지율이 폭락한 사건이 있었다. 연금 수령 연령을 65세로 높이는 내용인데, 지금 러시아 남성 평균 수명이 64세다. 거기에 정부 기관의 자국 국채 투자를 허용했다. 이걸 알고 나니 미국과 유럽이 신뢰를 깨면서까지 러시아 중앙은행의 예치금을 동결한 걸 이해했다. 이건 군자금이다.
종합하면 두 가지 결론이 나온다. 러시아의 침공은 불가피 했다는 것과 장기화할 거라는 점. 하나 더 추가하면 성공해도 러시아의, 정확히는 러시아 민족의 몰락은 피할 수 없다. 푸틴의 조바심이 이해가 가는 부분. 반면 러시아내 소수민족은 매우 빠르게 늘고 있다. 러시아 땅의 주인만 바뀌는 셈이다. 동시에 유럽은 늘상 해오던대로 전쟁의 땅으로 돌아가는가 싶다.
물론 변수는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도 쉽게 손에 넣지 못했다. 또 유럽과 미국이 단결했다. 독일이 아주 빠르게 재무장을 선언했다. 모두 절박한 심정의 푸틴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을 일이다. 그래도 선택지가 없으니 전쟁이 길어지고 커질 거란데 걸고 싶다. 여기서 저자는 미국이 나토에 대한 의무를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으로 평가한다. ‘미국이 만든 세계'는 무너져도 미국이 피해볼 건 없다는 것. 무기 지원하며 셰일을 팔면 된다. 역시 재수없다.
이 내용은 딱 한 챕터 내용이다. 조금 분량을 넘겨 얘기하면 유럽의 난리는 북해 원유를 중부 유럽으로 향하게 하고, 이걸 뺐긴 서유럽은 아프리카에서 당겨 오게 한다. 그럼 러시아산 수입이 막히고, 아프리카 원유가 유럽으로 가면 피해 보는 건? 동북아시아다. 결국 굶주린 동북아시아와 인도는 소용돌이에 휘말리는데.. 일단 여기까지 정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