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가 되면 인간은 매년 약 1% 가량 근육이 줄어든다고 한다. 평범한 성인 남자로 치면 가만히 있어도 매년 300~400g 씩 준다는 의미다. 근육량 1kg 늘리기가 얼마나 힘든가 생각하면, 장년이 되어서도 소싯적 몸을 유지하는 건 대단한 일이다.
이런 일을 무려 20년 넘게 해내는 기적을 이룬 나라가 있다. 일본이다. 일본은 2000년 무렵부터 매년 노동인구가 매년 약 1%씩 감소했다. 정점일 때 8700만 명이었던 노동인구는 그 사이에 1300만 명 넘게 줄었다. 국가를 움직일 근육이 15%나 감소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사이 일본 경제의 총생산은 매년 1%씩 증가했다는 점이다. 매년 근육량이 1% 줄어드는 몸을 갖고서 오히려 증량을 해온 셈이다. +1%와 -1%의 간극을 메운 건 생산성 향상이다. 더 적은 노동자가 일하고도 많은 산출물을 내는 생산성 향상을 이뤘다는 의미다.
GDP 통계를 보면 더 직관적이다. 2000년을 100으로 놓고 볼 때, 20년 사이 미국과 영국은 약 140, 독일과 프랑스는 120이 된 반면, 일본은 113 정도에 그친다. 이걸 보면 일본은 여전히 잃어버린 세월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모두가 비웃는다.
그런데 노동인구당 GDP를 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120 정도에 머무는 데 반해 일본은 135를 기록했다. 독일이 130 정도로 분발했지만, 일본에는 미치지 못했다. 즉 일본은 20년동안 주요국 가운데 노동자당 생산성이 가장(!) 빠르게 증가했다.
다들 늙어가는 와중에도 남은 힘을 끌어다 악으로 깡으로 버틴 결과다. 부양인구비가 치솟던 일본에 '1인당 GDP'의 렌즈를 끼고본 게 중요한 점을 놓치게 만들었다.
아직도 도장을 찍고, 팩스를 쓴다는 일본에 대한 인식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얘기다. 이런 얘기를 내가 하면야 욕 먹기 좋겠으나, 영국의 대표적 거시경제학자인 찰스 굿하트가 <인구 대역전>에서 풀어낸 주장이다. 그는 고령화를 먼저 맞이한 일본은 오히려 보고 배워야 할 '모범생'이라고 치켜 세운다.
그에 따르면 일본은 운때가 좋았다. 인구 정체되고 버블이 터진 1990년 무렵 세계에는 노동자가 흘러 넘치기 시작했다. 중국이 개혁개방에 속도를 냈고, 무너진 동구권에서도 노동력이 쏟아졌다. 일본 기업은 해외로 나가서 노동자와 소비시장을 구했다. 20% 수준이던 해외 생산 비율이 40%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올랐다.
선원은 줄고 배는 낡아 떠밀려가던 일본호가 세계 경제의 훈풍을 맞아 그나마 제자리라도 지킨 건 오히려 보고 배워야 할 업적이라는 게 찰스 굿하트의 평가다. (물론 버블 붕괴 직후 10여년간 일본의 거시경제 정책은 엉망이었다고 선을 긋는다.)
일본에 대한 재평가를 읽고 마음이 무거웠던 건, 이제 우리는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다. 우리는 이제 일본의 헤이세이 시대에 접어든다. 그런데 세계 경제의 순풍이 역풍으로 바뀌고 있다. 2010년대에 선진국을 시작으로 마침내 중국까지 노동인구가 줄기 시작했다. 소비처인 선진국은 장벽을 세우고 있다.
우린 일본의 헤이세이 시기(1989년~2019년)을 보면서 실패의 총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쩌면 (많은 실책이 있었지만) 일본은 이런 고난의 시기를 이례적으로 성공적으로 넘은 걸지도 모른다. 세계의 노동 공급 증가로 낮은 물가를 유지했고, 성공적인 해외 진출로 생산성도 높여왔다. 남들보다 숙제를 먼저 해치운 것이다.
우리가 비웃는 정치도 꽤 역동적으로 발버둥쳤다. 55년 체제로 문질러서 무시하지만, 사실 일본은 1989년에 1당이 자민당에서 사회당으로 넘어간다. 이 이변을 이끈게 젊은 여성 정치인 도이 다카코였다. 1992년엔 일본신당이 나와서 집권까지 성공하고, 무려 개헌보다 어렵다는 선거제 개혁을 해낸다. 별짓을 다해본거다.
물론 일본의 이른바 정치 개혁 시도들은 하나같이 단기간에 끝났다. 그럼에도 일본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망했다'는 일반적 인식은 사실과 다르다.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역풍을 맞으며 이 시대에 접어들 우리는 이정도 혁신을 이뤄낼 지 장담하기 힘들다.
일본의 지난 40년은 늙어가는 나라는 나라 안에서 발버둥을 쳐도 잘해야 본전이라는 암울한 현실을 말해준다. 새치가 성성한 아저씨가 20살 때처럼 이틀 밤을 세고도 쌩쌩하지 않다고 푸념해봐야 별무소용이다. 한국은 늙어가고 세계도 그렇다. 이 수레바퀴가 뒤로 돌진 않을 것이다.
<헤이세이사>를 읽으며, 우린 일본이란 교보재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나 생각했다. 예순살에도 노쇠한 팔로 벤치프레스를 치는 옆집 노인을 보며 비웃는, 이제 근감소가 시작될 30살 청년이 아닐까. 얼마전 간 일본에서 '남루하다'는 인상을 받았던 게 뒷맛이 개운치 않은 이유다.
역사가 가치있는 건 자기객관화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때부턴가 남을 내가 보고픈대로 보게 하는, 타자주관화의 연장이 된 것 같아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