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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은 어떻게 팬데믹이 됐나①

날짜
2021/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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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케이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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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한 대형쇼핑몰에 수백명이 모여 에스파의 '넥스트레벨'을 따라 춤추는 영상을 봤다. 코로나로 오갈 길도 막히고 유튜브도 닫아놨지만 청년들이 '광야'로 몰려가는 건 막지 못했다. 애국주의를 조장하고 외국 가수 팬덤을 아니꼽게 보고 있는 중국 정부로선 한숨 나는 모습이다. 어느 댓글이 말한 것처럼 케이팝은 마치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전염병은 케이팝의 성공을 설명하는데 유용한 모델이다. 케이팝의 대확산을 Korean 'Wave'로 부르는 건 의미심장하다. 케이팝을 몇번 오가다 말 유행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나누자면 2000년대 겨울연가를 타고 일본에서 1차 유행이 있었고, 2013년 무렵에 2차 유행이 퍼졌다. 잠잠하다가 가끔 확진자 수가 치솟는 코로나 그래프가 떠오른다.
그러다 완전히 전세계로 퍼진 팬데믹이 됐다. 그럴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전염병 확산의 조건은 이렇다.
①대규모 집단 ②교통의 발달 ③활발한 변이

조건① 대규모 집단(시장)의 존재

세계 인구밀도 지도 [출처 Worldometer]
전세계로 퍼진 전염병 중 상당수는 아시아에서 기원한다. 인구밀도가 굉장히 높기 때문이다. 특히 높은 중국 남부 지방과 인도는 전염병의 요람 역할을 했다. 많은 숙주는 대확산의 필수 요소다. 케이팝은 세계 2위 규모의 일본 시장을 바로 옆에 두고 탄생했다. 일본 음악 시장 규모는 무려 미국의 절반 크기다. 상대적으로 문화적 거리가 가까운데다 규모도 큰 일본 시장은 유력한 전파 대상이었다.
가까이 큰 시장을 둔 행운도 있었지만, 한 세대 만에 1인당 국민 소득이 3배 증가한 한국의 빠른 성장도 축복이었다. 본격적으로 케이팝이 태동했다고 보는 1990년대 중반 1인당 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한 한국은 약 30년 만에 3만 달러로 뛰어올랐다. 1만 달러는 중남미와 동남아시아 상당수 국가가 탈출하지 못하는 마의 구간이다. 이런 함정에 걸리지 않고 고속 성장한 내수 시장은 끝없이 케이팝에 영양을 공급했다.

조건② 교통(유통 채널)의 발달

케이팝을 언급한 트윗의 연도별 확산 추이. [출처 트위터]
감염병 전문가들은 2000년대 들어 더 잦은 대규모 전염병의 확산을 경고했다. 교통의 발달 때문이다. 경제성장으로 전세계를 오가는 항공기는 빠르게 늘고 있다. 빠른 경제 성장으로 중국인이 항공기를 타기 시작한 게 결정적이었다. 예언은 현실이 됐다. 2000년대 이후 대규모 전염병이 번지는 주기는 짧아지고 있다.
음악계에도 비슷한 시기에 혁명이 일어났다. 넥스터를 시작으로 디지털 파일로 듣는 문화가 퍼지기 시작했다. CD나 테이프에 묶여 있던 음악이 돈 한 푼 안들이고 전세계로 퍼질 수단을 찾은 것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터넷 보급이 빠른 나라였다. 어느 순간 모두가 인터넷에서 공짜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디지털 음원의 등장으로 축소됐던 음악시장이 스트리밍의 영향으로 다시 성장하고 있다. [출처 IFPI 2020년 글로벌 뮤직 리포트]
고통스러운 변화였지만 창작자들은 빠르게 적응했다. CD 시장이 90% 가까이 무너진 상황에서 선택지는 없었다. 오히려 기회를 발견했다. 듣는 음악에 집착하지 않고 보는 음악에서 답을 찾았다. 일본 시장을 십수년간 두드리며 쌓은 퍼포먼스 역량이 마침내 제대로 된 탈 것을 만나자 전세계로 퍼졌다.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다. 디지털에 일찍이 적응할 준비를 해온 끝에 결실을 맺었다.

조건③ 활발한 변이(혼종)

수많은 바이러스 가운데 인류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동물에게서 와 사람에게로 퍼진 '인수공통 바이러스'라는 점이다. 널리 알려졌듯 코로나는 박쥐에서 시작해 천산갑을 거쳐 인간에게 번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스와 조류독감, 결핵, 에이즈 등은 모두 동물에게서 왔다.
대부분의 바이러스는 동물에서 사람에게로 넘어오지 못한다. 서로 다른 시스템을 갖고 있어 넘어와서 퍼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인간에게 적응해 퍼지면 엄청난 전파력을 보인다. 인간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낯선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바이러스가 인간의 면역 체계에 맞는 열쇠를 찾긴 어렵지만, 일단 열리면 속수무책이다.
큰 시장 규모와 유통 채널의 변화는 왜 유독 케이팝만 그 수혜를 입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케이팝의 핵심은 미국식 팝의 보편성과 한국 특유의 색깔이 묘하게 섞인 혼종성이다. 케이팝은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도 '보편성'의 문을 열 많은 열쇠도 품고 있다. 한 때는 콤플렉스였던 '정체불명'이 이젠 아이덴티티다. 한 곡 안에 힙합부터 락, EDM에서 라틴까지 모두 섞여있다.
케이팝은 미국의 흑인음악과 제이팝의 영향을 받았고 그 특성을 모두 품었다. 케이팝의 시초로 보는 서태지는 당시로선 낯선 흑인음악의 코드를 들여왔다. 우리가 익숙한 아이돌 시스템은 일본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아이돌 시스템을 수출한 일본은 '일본스러움'에 갖혀 내수용에 머물렀지만, 케이팝은 아이돌 시스템에 보편성을 갖춘 음악을 실어 혼종 그 자체인 문화를 만들었다.
아시아의 특수성과 미국이 대표하는 주류 시장의 특징이 만나 결합할 경우 나오는 폭발력은 홍콩 문화가 보여줬다. 90년대 아시아에서 강한 영향력을 보인 홍콩 문화는 중국 문화와 자유로운 홍콩의 세련된 특성이 묘하게 결합돼 탄생했다. 중국과 영국이 닿는 경계에서 변이가 일어난 한 사례다.